97년 12월3일은 해방후 한국경제사의 한단락을 그은 날이 되고 말았다.

피땀흘려 일해온 근로자들과 기업인,이들을 잘 조직해 왔던 개발연대의
유능한 조타수였던 공무원들 모두가 처참한 패배를 자인하는 날이 되고
말았다.

문민정부 5년의 허망한 정치투쟁과 개발연대 동안 누적되어 왔던 모순들이
누적된 끝에 우리경제는 스스로는 더이상 어찌해볼 수단도 없는 무능력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죽어라고 귀를 틀어 막아왔던 정부, 세상의 변화에는 아랑곳 없이 낡은
방식대로 살아온 금융인, 죽어라 이권만 챙겨왔던 정치인, 어리석게도
정부지원과 차입경영에만 의존해 왔던 기업인들이 공동으로 만들어낸 참담한
결과일 뿐이다.

국민들은 호화판 해외여행에 익숙해 들고 졸부들은 어리석게도 해외에서
싹쓸이 쇼핑을 나다녔다.

이제 잔치는 끝나고 고난의 계절이 왔다.

세금이 올라가고 직장에서 밀려나고 금융기관이 문을 닫고 기업들은 생살을
도려내는 막다른 골목에 밀려들었다.

당장 내년에는 실업자가 1백만명이상으로 불어나고 길거리에는 문을 닫는
가게들이 속출할 것이다.

명예퇴직이라는 말은 차라리 사치스런 말이 되고 말았다.

금리가 치솟고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는 복합불황의 길고 긴 터널이
우리앞에 가로놓여 있다.

설마 우리경제가 망하기야 하겠느냐는 어리석은 자만은 이제 진면목을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싸늘한 자각으로 바뀌고 있다.

시민들은 국치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리고 과천의 콧대 높던 공무원들은
어깨가 늘어졌다.

미셸 캉드쉬 IMF총재가 김포에 저승사자처럼 들이닥치는 순간 종금사들이며
은행들이며 기업들은 통합이냐 폐업이냐 부도냐를 놓고 초읽기에 몰려들고
있다.

개발연대 30년의 공든탑이 허망하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산업은행같은 국책은행조차 해외에서 외화부도에 초읽기를 당하고 대기업
순위를 다투는 초대형 기업들도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

이제 재경원의 장관실 옆에는 IMF에서 나온 파견관이 사무실을 차리고
신탁통치를 시작하게 됐다.

세금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정부의 조직을 개편하는 일, 금융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며 기업경영의 투명성등 이 모든 일에 대해 시시콜콜 간섭과
통제와 허가를 받아야 하는 법정관리 경제로 들어서 있다.

재경원 관계자의 말로도 경제주권조차 없는 최소한 2년이상의 신탁통치
기간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문제는 이기간을 지나고 나면 우리가 이제는 제발로 일어설 것이냐는데
있다.

벌써부터 우리나라의 금융위기는 미국의 음모라는 등의 치열한 논리가
전개되어 왔던 터였다.

비장한 각오로 다시 뛰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서 개발연대의 그때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자리에 우리는 섰다.

정치권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대권을 향해다투는 정치인들은 당선 되자 마자 굴욕부터 당해야 할
것이고 이합집산 하는 국회의원들은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손을 들고 도장을
찍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모진 각오로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리고 구제금융을 받고서야
연명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시간이
왔다.

5백50억달러의 대가는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 정규재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2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