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순 민주당 총재는 아직 "정치인"이라기 보다는 "경제학자"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서울대 교수시절 쓴 "경제원론"은 경제학의 베스트셀러로 꼽히고 있고
지금도 한국 경제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강릉 출신으로 경기중학시절 독서회에 가입, 사회주의서적을 탐독하기도 해
훗날 이로 인해 "이념문제" 논란을 빚기도 했다.

조총재는 서울대 상과대 전문부를 졸업하고 6.25때 육군 통역장교를 거쳐
육사 영어교수가 됐다.

57년 미국유학을 떠나 10년만에 귀국, 만40세에 서울대 상대교수가 됐다.

그가 학교를 떠난 것은 노태우 대통령시절인 88년말 경제부총리를 맡으면서
부터.

부총리에 이어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하면서 "경제안정론"을 고수하다 정부
여당과 잦은 마찰을 빚어 도중하차했다.

특히 금융실명제와 토지공개념제도를 지지하고 이를 도입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은 총재를 물러난 것도 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후보
측과 정부가 요구한 "금리 인하와 통화량 증가" 등 경기부양책을 거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95년 6.27 지방선거에서 김대중 총재의 전폭적 지지로 서울시장에
당선, 2년여의 재임기간중 "포청천" "산신령"이라는 이미지로 도덕성과
청렴성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추진력이 부족하고 공무원들을 제대로 부릴수 있는 치밀성과 조직성
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받았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소신파"라는 평가와 현실을 모르는 "책상물림"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조시장이 현실정치의 파고를 어떻게 헤쳐나갈지
주목된다.

< 손상우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8월 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