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빈민가의 무명낙서화가에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 부와
명성을 얻었으나 28세에 요절한 장 미셀 바스키아 (1960~88)의 회고전이
15일~8월17일 서울 종로구사간동 갤러리현대 (734-6111)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회는 바스키아의 10주기를 기해 마련된 아시아순회 회고전의
일환으로 일본전에 앞서 열리는 것이다.

전시작은 "무제" 연작과 "베이비붐" "잿물" "기도하는 사람" "큰탑"
"흑인" "재즈" 등 38점.

그의 대표작중 엄선된 것들로 갖가지 사물과 어휘,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그가 활동한 당시의 미국 사회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팝아트계열의 천재적 구상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바스키아는 지하철과
거리를 메운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킨 장본인.

서른살도 못채우고 짧은 생을 마감한 그는 뉴욕 흑인사회의 가난한
낙서광이었다.

17세에 학교를 중퇴한 뒤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하면서 맨해튼 주변의
건물과 지하철에 낙서를 해대던 그가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80년 뉴욕의
타임스퀘어쇼에 작품을 선보이면서부터.

기존제도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비인간화를 주도하는 일체의 모순을
그림을 통해 강렬하게 비판한 그의 예술혼이 빛을 보게 되면서 바스키아는
일거에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82년 독일 카셀도큐멘타에 최연소작가로 참가한데 이어 83년
휘트니비엔날레에 참가, 이목을 집중시킨 그는 84년 뉴욕현대미술관에서
작품전을 갖는 영광을 안게 됐고 당시 명성을 날리던 팝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과 공동작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가 택한 주제는 자전적 이야기와 만화책 해부학 낙서및 그것과 연관된
기호와 상징뿐만 아니라 인종주의, 죽음과 관련된 단어와 문구까지도
포괄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영어 스페인어 불어 독어 이탈리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들과 회화 드로잉 콜라주 실크스크린 조각과 같은 다양한 장르로
표현된다.

캔버스뿐만 아니라 펀치백 축구공 냉장고 옷등 주변의 갖가지 물건에
즉흥적으로 작업했던 그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통해 기존제도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비인간화를 주도하는 일체의 모순들을 그림을 통해 통렬하게
비판한 젊은 예술가였다.

미술평론가 유홍준씨는 "철저하게 소외된 삶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우고
간 미국 흑인사회의 대표작가"라고 소개하고 "거리의 낙서화를 순수미술로
수용한 미국 미술계의 열린 시각도 함께 살펴볼수 있다"고 밝혔다.

< 백창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7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