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은행장은 요즘 금융불안의 진원지처럼 되어있다.

유원 한보 등 잇따른 대형 부도로 직격탄을 맞았고 두명의 전직 은행장이
잇따라 구속됐다.

청문회가 열리면 제일은행이라는 이름은 마치 부패금융의 상징처럼
거론되는 요즈음이다.

한보 뒤처리에 분주한 유시열 행장을 만나 위기를 맞고 있는 제일은행
이야기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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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사람 = 정규재 경제부 차장 ]

-한국은행 부총재에서 제일은행장으로 오셨는데요.

밖에서 보던 것과 행장으로서 본 제일은행이 많이 달랐습니까.

얼마나 심각한지요.

"한국은행에서 볼 때와는 아무래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우선 그쪽은 이론위주지요.

여기는 금융의 현장이고.최근의 어려움과 관련해서 제일은행이 지금 많은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유동성과 수지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물론 절대 유동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금리부담을 더해야 한다는
겁니다"

-올해 결산에서 당기순이익은 낼수 있습니까.

적자가 불가피하겠지요.

"어렵다고 봐야지요.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하는 것도 많고.

그러나 한보철강의 3자인수가 원활하게 진행되면 사정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한보철강은 누가 인수합니까.

한보의 정총회장은 음모가 있다고 까지 극언을 했는데.

"음모는 무슨.

다만 몇군데 관심있는 기업이 있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벌써 이런저런 서류를 챙겨갔고 나름대로 기초조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분명 3자인수는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재로서 회사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합니다"

-국민기업화 한다는 방안은 완전히 백지화됐습니까.

"은행대출금의 출자전환 등에 문제가 많습니다.

어차피 무수익 자산으로 남는 것이고, 은행손실을 극소화하는 데도
도움이 안됩니다.

주인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 모두의 피해가 커질게 뻔합니다.

조속히 진행되는게 좋습니다"

-3자인수 시기는 언제쯤인가요.

어차피 새정부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글쎄요.

가능한 한 빨리 하는 것이 좋겠지요.

다른 고려사항은 있을수 없습니다.

빠르면 인수자선정이 상반기중에라도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늦출 이유는 없습니다"

-제일은행의 위기는 연착륙하고 있는 겁니까.

"위기는 해소되는 중입니다.

4월부터는 계수도 좋아지고 있고요.

해외에서도 한보사건 직후엔 조달금리 스프레드가 많이 올라갔으나 요즘은
모두 진정되고 있습니다.

완전히 회복되고 있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임직원들이 다시 뛰고 있는 만큼
멀지 않아 정상화될 겁니다.

48조원의 자산에 1조원의 부실은 경영을 흔들 정도는 결코 아닙니다.

과거 해외건설 부실때 당시 자산규모가 10조원 이하였던데 반해 부실
규모는 자산의 20%에 달했습니다.

그런 위기도 모두 극복했습니다.

또 지난해 우리은행의 업무이익이 5천억원이었습니다.

1조원정도의 부실은 충분히 관리할수 있습니다"

-은행장 자리는 어떻습니까.

어려운 시기에 맡게돼 소회가 많을 텐데요.

"은행장은 무서운 결단과 사회풍토를 이겨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는 정상적인 은행업무와 기능을 방해하는 요인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외부 입김에 의해 행장이 선임되기도 했고, 이 때문에 좋지
못한 일들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행장부임 이후 특정기업과 관련한 전화청탁이라든가, 요즘 흔히 말하는
"외압"은 없었습니까.

"서너차례 있었습니다.

굳이 외압이라고는 말할수 없고.

전부터 알고 지내왔던 사람들로 부터 관심을 가져달라는 식의 전화를
받았지요.

그러나 모두 제선에서 끝냈습니다.

담당자들에겐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지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압력으로 작용하지 않겠습니까"

-은행장의 정상적인 업무집행을 막는 사회풍토란 어떤 겁니까.

궁극적으로 행장선임은 어떤 방법이 가장 이상적일까요.

"시쳇말로 흔드는 거지요.

남이 어려울 때 밖에서 흔드는 더티 플레이가 없어야 합니다.

행장 선임방법도 중요하지만 사회환경이 더 중요합니다.

행장을 보는 시각이나 사회적 퐁토가 바뀌어야 해요"

-한보이야기를 좀더 해보시죠.

행장으로 부임하신지도 꽤 됐으니 이제 한보 사건의 시작과 결말을 모두
파악하셨을 텐데요.

"지금 청문회가 진행중이어서 무어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파봐야 나올게 없다는 겁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별다른 배경같은 것이 없습니다.

당초 은행들이 경쟁적으로 사업을 유치했던 것인데 사업초기에는
외압이란게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제2의 포철이라고 생각들 했던 거지요.

포철이 성공하면서 은행들은 큰 이익을 냈지않습니까.

포철 신화같은 것이었어요.

또 한보가 철강을 시작할 당시 철근부족 등 시장성이 높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 모두가 철강산업의 성장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전부죠.

또 당시에는 제조업 설비투자가 극히 저조해 은행들로서는 큰
고객이었지요"

-그런데 결국 부도가 났지 않습니까.

"문제는 시간이 가면서 시설비용이 계속 불어났고 장치산업의 특성상
준공후에나 담보를 잡을수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그래서 은행들은 돈을 더 대주고 준공후 후취담보를 잡는다는 방침을
정하게 된 것이지요.

다른 이야기란 있을게 없습니다"

-류행장께서는 어떤 방법이 좋았다고 보십니까.

후취담보를 잡으면 담보는 모두 해결되나요.

"개인적으로는 자금을 지원해 먼저 공장을 완공시킨 다음 담보를 잡고
부도를 내거나 제3자에게 인수시키는 등의 방법을 고려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일은행이 한보는 안되겠다고 판단한 시기는 언제였습니까.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기는 협조융자가 나가던 1월8일이었습니다.

관련서류를 챙겨보면 그 시점이 분명합니다"

-새로 도입한 여신위원회는 잘돌아갈 것으로 보십니까.

지나치게 형식위주로 흘러 벤처성 기업이나 담보가 없는 곳에는
자금지원이 안될 것이란 우려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신위원회는 은행장 전결사항만 처리하기 때문에 행장의 독선을 막자는
것이지 각단계에서의 통상적인 자금지원을 모두 체크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사람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조직원전체의 힘을 능가할수는 없는
만큼 여신위의 기능은 활성화될 것으로 봅니다"

-행장하는 재미가 갈수록 적어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리는데요.

"그동안 은행장 한사람의 지도력이 너무 신화적으로 흘러왔습니다.

그런 시대는 끝나야지요.

인사문제도 이사회로 넘겨 결정하고 은행내 각분야의 전문가들이 자기일을
소신있게 할수 있도록 하면 되지요.

그것도 결코 만만치 않은 일감입니다"

-류행장께서 부임직후 새임원을 선임할때 사용하신 방법이 특이해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중간 간부들로부터 무작위로 이름을 써내게해 중역을 선임했는데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생각입니까.

"사람들 눈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산표가 나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는데 표가 한두사람에 집중되더군요.

이런 방법을 계속 쓸 것인가는 좀더 두고 생각해볼 과제입니다"

-자구계획은 잘돼 갑니까.

"무엇이든 팔수 있는 것은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매각할 계획입니다.

은행수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정리해야지요.

일은증권과 상호신용금고도 포함됩니다"

-상업은행으로부터 증권사를 매입했는데 상업은행은 어떻든 잘되고 있고
제일은행은 지금 그 회사를 몇년만에 다시 팔려고 합니다.

책임문제가 있어야하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우고 동시에 권한을 부여하는 풍토를
확립하겠습니다"

-금융개혁위원회가 활동중입니다.

궁극적으로 은행에도 주인이 있어야 하겠지요.

"신한은행이나 하나 보람은행 등이 비교적 잘되고 있어 그런 말이 나오는
것같은데.

그러나 이런 은행은 누적부실이 적고 몸집도 작습니다.

대형은행들이 경제에 기여해온 점은 제쳐 두고 지금와서 주인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고 봅니다.

은행의 문제는 경영자의 책임의식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