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김정호.안산=문병환 기자 ]

지난 4일 오후 울산 현대자동차 자재본부 박승하 이사실.

조업단축에 관한 협력업체들의 빗발치는 문의전화에 박이사는 진땀을
흘린다.

협력업체 총회에 나가 "결코 조업단축이란 없다"고 못박았던 것이 고작
2주일전.

해명은 궁하고 목소리는 기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갈까요"

"어음은 돌아오는데 납품은 갈수록 줄어드니..."

협력업체 사장들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외에 그라고 뾰족한 대안이 없으니
그저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현대에 목을 달고 있는 부품업체가 3천3백갭니다.

식구수를 따지면 34만명이지요.

모기업이 조업단축에 들어갔는데 협력업체들이라고 멀쩡하겠습니까"

박이사의 말처럼 현대자동차 협력업체 가운데 올들어 이미 영화공업
대진폴리머 한일기계 등 3개 업체가 부도를 냈다.

지난 1월 노동법 관련 파업으로 현대의 조업이 보름가량 이뤄지지 않은데
따른 후유증이다.

이런 와중에 조업단축이라니, 협력업체들에는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다.

자동차산업이 국내 제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

직.간접 고용은 1백50만명에 이른다.

수출도 지난해 1백억달러를 넘었다.

이처럼 전후방 파급효과가 큰 자동차산업의 붕괴는 곧 한국제조업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1월에 한방 먹었지요.

게다가 알게 모르게 이미 납품이 20~30% 줄었어요.

여기다 잔업까지 안한다니 또 20%이상 줄지 않겠습니까"

현대자동차에 시트부품을 납품하고 있는 영수물산의 송경빈 회장은
"어렵다"는 이야기만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래도 골프카제조나 항공기시트부품 쪽으로 사업을 다각화해놓은 영수물산
의 타격은 덜하다.

1백% 자동차부품에 사활을 맡긴 업체들은 그저 죽을 맛이다.

부품업체의 이런 위기의식은 비단 울산지역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우리가 기아에 납품하는 물량이 약 20억원어치입니다.

그런데 1월에는 7억원어치도 못했어요.

재료비가 많아 14억원의 어음은 돌아오는데 10억원이상이 펑크나더라구요.

하다하다 안돼서 7억원정도는 사채로 메웠습니다" 경인지역에서 부품업체를
경영하는 K사장의 하소연이다.

그는 여기에 덧붙여 "빚 갚는데 정신이 팔려 품질은 뒷전"이라는 고백까지
곁들인다.

"납품이 줄어든 1~3월에 발행한 어음이 4~5월에 집중적으로 돌아옵니다.

그때는 또 법인세니 부가세니 세금철 아닙니까.

업계에서 "5월 대란설"이 나도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또다른 부품업체의 C사장은 아무래도 오는 5월은 "잔인한 달"이 될 것같다며
찌푸린 얼굴을 펴지 못한다.

사실 5월이면 임단협 시즌이기도 하다.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수 없는 파국을 맞을 판이다.

협력업체 사장들은 자다가도 가위에 눌리기가 일쑤다.

"정부가 중소기업청이라고 만들었지요.

정책자금도 늘렸답디다.

그런데 그 돈 구경하기 힘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울산에서 내장재 납품을 하는 H사 L사장은 담보도 다 소진돼 자금을 꿔댈
재간이 더이상 없다고 울상이다.

사채를 끌어다 사채를 막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오히려 정책자금 규모를 줄이더라도 신용대출을 확대하는게 급선무가
아니냐는 하소연이다.

"1월에도 모기업의 파업이 한달만 계속됐어도 현대자동차 협력업체의 절반은
절단났을 겁니다.

조업단축도 마찬가지예요.

길어지면 죄다 회생불능의 상태에 빠질 겁니다.

그리고 난뒤 완성차업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영수물산 송회장은 4일 조회때 전 임직원들을 불러놓고 "현대차 팔아주기
운동"에 나서자고 호소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황에 모기업과 협력업체가 서로 돕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자동차산업의 경쟁력은 부품산업의 경쟁력에서 나온다.

부품산업이 흔들려서는 자동차산업의 미래는 없다.

중소기업을 붙잡아줄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이 지금 이 상황에선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한국경제신문 1997년 4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