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랩문화를 한국에 정착시킨 장본인"

크린랩 직원들은 전병수 사장을 이렇게 부른다.

요새 이 회사제품을 써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정도로 이젠 크린랩이
식품포장재로 대중화됐기 때문이다.

랩의 보편화는 이 회사의 꾸준한 성장세가 반증해준다.

회사설립이래 크린랩이 주제품인 이 회사의 매출은 연평균 20~25%의
성장률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지난해 1백억원어치 이상을 판매했고 가정용 랩은 국내시장 점유율이
80% 정도로 압도적이다.

그러나 전사장에 대한 평가는 이같은 랩 보급확산보다 무공해 랩에 대한
그의 한없는 사랑에 더 점수를 후하게 준 결과이다.

그의 랩사업은 8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렸을때 가족과 함께 일본 나고야로 건너간후 70년대 초반부터
폐유정제사업을 해오던 전사장은 일본에서는 찾아볼수 없던 PVC랩이 한국에
판매되고 있는 것을 알게됐다.

PVC랩이 유해하다고 판단한 그는 소비자가 안심하고 쓸수 있는 무독성
식품포장재를 고국에서 만들어야겠다는 열망을 갖고 40년만에 현해탄을
건너왔다.

그가 같이 온 일본기술자와 함께 인체에 해가 없는 LLDPE (선형저밀도
폴리에틸렌)를 주원료로 한 PE랩을 개발, 회사를 설립해 판매에 나선 것은
81년.

그러나 그의 순수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형편없었다.

럭키 등 막강한 조직력과 지명도를 앞세운 대기업들이 PVC랩으로 이미
시장을 평정해놓은 상태였기 때문.

이에따라 사업 첫해부터 나기 시작한 적자는 해가 갈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누적적자가 순식간에 자본금을 전액 잠식해버렸다.

직원들의 봉급과 보너스를 체불하지 않기 위해 사재를 털어야 했다.

급기야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그가 크린랩사업을 마지막까지 놓지 못한 것은 크린랩이
언젠가는 소비자들로부터 정당한 평가를 받으리란 한가닥 기대때문이었다.

또한번 제품을 써본 사람은 꼭 다시 크린랩을 찾는 것도 큰 힘이 됐다.

"흑자가 나면 내가 가져가지 않고 다 돌려줄테니 아무생각말고 열심히
일만하라고 직원들을 독려했습니다"

자금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은행돈 한푼 빌려쓰지 않고 버텨 나갔다.

그러던 차에 80년대 후반들어 회사경영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바로 PVC랩에 대한 유해논쟁이 일면서부터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 일본 중국 호주 등 5개국에서 특허를
획득한데다 미국 식품의약국 (FDA)으로부터 안정성 적법판정을 받은
독창적인 기술로 만든 크린랩이 비로소 인기몰이에 돌입했다.

90년이 되자 처음 흑자를 냈다.

수천만원에 불과했지만 창립이래 처음이었다.

이후 안정적인 성장기조가 유지됐다.

이제 적자를 면치못하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일이 돼버렸다.

하지만 크린랩의 회계장부에는 회사가 어렵던 시절 전사장이 개인적으로
털어넣은 수십억원이 주주차입금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훈장처럼 남아 있다.

매출액의 3%이상을 연구개발비로 매년 쏟아부으면서 품질하나만으로
대기업들의 경쟁을 따돌리고 랩시장에 우뚝서게된 전사장이 항상
직원들에게 하는 얘기가 있다.

"삼성 현대보다 더 좋은 회사를 만드는 게 내 꿈입니다. 여러분은 나의
경영방침을 믿고 따라 주십시오"

전사장은 최근에는 일부 대기업에서 직원들을 스카우트까지 해가며
랩시장에 뛰어들 기미를 보이자 다소 심기가 불편해져있다.

하지만 2002년까지 1천만달러이상을 투자해 중국에 6개의 주방용품
공장을 짓기로 하는 등 해외시장 개척에 나서면서 제2의 도약을 노리고
있다.

< 이창호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