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연말 금융권에 발이 넓기로 소문난 Y씨의 인사동 사무실.

중간브로커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두명의 건장한 남자가 나타났다.

"한보철강이 발행한 어음 1천억원어치를 갖고 있다.

금융기관을 소개해 달라.

팩토링사 할부금융 신용금고 어디라도 좋다.

어음을 잘게 쪼개서 할인해도 좋다"

이들은 무려 30%선의 할인율에 별도로 3~5%의 커미션을 은밀히 제시했다.

평상시로서는 있을 수도 없는 파격적인 조건.

"한보철강이 직접 할인하면 될텐데 그일을 왜 당신들이 대신 하나.

금융기관에서 융통어음은 받아주지 않을텐데"

"필요하다면 세금계산서를 붙여 진성어음으로 만들수 있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다"

한보철강은 자금이 부족해지기 시작하자 이미 지난해 10월부터 융통어음을
진성어음으로 변조해 돌리기 시작했다.

사채업자를 통해 자금을 조성토록 요청한뒤 이를 할인하는 변칙까지 동원
했다.

Y씨에게 찾아온 중간브로커들도 이런 과정에 개입한 사람들이다.

한보는 은행이 손을 끊고(11월25일) 서울지역 금융기관들이 등을 돌리자
(11월말) 12월부터는 지방의 초소형 금융기관과 미니사채업자들에까지
한보어음이 밀려들었다.

대구 K신용금고의 박모이사는 "지난 11월말쯤 한보그룹 사람들이 전화로
할인을 의뢰해왔다.

설마 한보가 부도날까 하는 생각으로 10억원정도 할인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신용금고만이 아니라 팩토링사에도 손을 벌리고 심지어는 제주도까지
비행기로 날아갔다.

"어음쪼개기" "어음바꿔치기" 등의 다양한 수법도 등장했다.

한보는 심지어 하청업체가 갖고 있는 어음을 할인이 잘안되는 한보어음과
강제로 바꿔치는 수법으로 자금을 강탈하다시피했다.

이래도 잘 안돼자 어음만기마저 줄였다.

"융통어음은 통상 만기가 3개월인데 지난해 10월이후 한보철강은 만기
1개월짜리를 돌리기 시작했다"(K신용금고 이모 과장)

해를 넘기면서 이렇게 발급된 어음이 드디어 교환에 들기 시작했다.

한승수 부총리의 국회보고에서도 이 사실은 드러났다.

"한보가 은행에 결제를 요청한 금액은 5백74억원이었다.

그러나 은행에 돌아온 어음은 요청금액의 3배인 1천6백78억원이었다"

결국 이같은 과정을 통해 한보 부도파문은 정보력이 약한 제2금융권의
신형 금융기관들을 초토화시키고 말았다.

지난 연초 바클레이즈증권사는 기관투자가들을 대상으로 몇쪽짜리 투자
설명회자료를 돌렸다.

이 자료는 한보철강의 자금현황을 분석하면서 "한보철강의 차입금규모로
볼때 부도가능성도 있다"고 진단했다.

이게 "한보 괴문서"로 둔갑해 증권시장과 금융계를 돌아다녔고 부도설을
증폭시켰다.

이러자 지난 1월10일 서울지검이 조사에 착수했다.

바클레이즈증권 서울지점장인 주진술씨가 불려갔다.

조사중이던 1월18일 한보가 부도를 내는 바람에 이사건은 대검에 넘어갔다.

물론 지금은 종료된 상태.

증권가에는 증권사 금융기관 대기업 감독기관 등이 참석하는 정보회의가
굵은 것만도 10여개가 활동중이다.

때로는 안기부 요원도 관계해 있다.

한보 괴문서는 몇건이 따로따로 나돌았다.

다급해진건 한보그룹이었다.

한보그룹 고위관계자는 "전혀 근거없는 루머다.

루머의 진원지를 추적하다가 처음에는 제철사업에 관심이 있는 현대그룹인줄
알았으나 나중에 보니 삼성그룹이었다"고 둘러댔다.

정총회장이 검찰출두 전에 "음해세력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한보는 정말로 삼성그룹이 진원지라고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삼성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지만.

한보그룹 사람들은 아직도 루머가 부도를 불러일으켰다고 믿는다.

그러나 방만한 자금관리가 루머를 만들어 냈고 스스로의 묘혈을 팠다.

10월이후 부도까지의 3개월 동안, 특히 최후의 한달간은 다름아닌 "정보력"
이 금융기관들의 명암을 갈랐다.

< 안상욱.정한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2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