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꿈도 안꾼다. 그나마 목만 달아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심정으로
산다"

A전자 해외영업본부 P상무의 하소연이다.

"예전엔 그래도 자부심도, 권위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자리가 흔들린다는
걸 생각하면 임원이란 타이틀이 오히려 빛좋은 개살구로 느껴진다"

기업의 별이라는 임원.

그들 임원들에게 이번 인사시즌은 "공포의 계절"이 됐다.

각 기업의 "칼질 인사"가 예외없이 임원들을 직접적으로 겨냥했기 때문이다.

불황과 구조조정은 상당수 샐러리맨들을 명예퇴직과 감원의 소용돌이로
밀어넣었지만 파동의 최대 피해자는 임원이었다.

지난해말 정기임원인사를 실시한 현대그룹의 경우 줄잡아 1백명에 가까운
임원들이 옷을 벗었다.

건설과 중공업등 몸집이 비대하면서도 경영여건이 좋지 않은 계열사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LG그룹도 마찬가지다.

LG전자부품 L상무 등 그룹 전체적으로 30명을 웃도는 임원들이 퇴직했다.

2월부터 시작될 주총을 계기로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임원들이 옷을 벗게
될것이란 소문도 들린다.

쌍용에선 전체 임원의 10%에 해당하는 30여명이 회사를 떠났다.

살아남은 임원들은 그야말로 "동료의 시체"를 넘고 넘은 셈이다.

전체 임원 TO를 조절하기 위해 임원 승진자수를 아예 줄이는 방법을 쓴
그룹들도 있다.

대표이사급에선 더했다.

삼성그룹은 무려 7명의 대표이사급을 상담역으로 발령냈다.

임동승 윤기선 황선두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그룹에선 정하오 엔지니어링사장과 김명관 케피코사장이 고문으로
물러났으며 LG그룹도 박수환 상사사장, 이정성 금속사장 등 4명이 사실상
경영에서 손을 뗐다.

아직 임원인사를 실시하지 않은 그룹들은 더욱 뒤숭숭하다.

삼성그룹에선 "1백명 정리설"이 대세처럼 떠돌고 있다.

전관은 전체 48명의 임원중 7명이 자문역으로 확정됐으며 전자에서도
보직을 받지 못하는 임원들이 상당수에 이를 것이라는 등의 루머가 끊이지
않고 있다.

상대적으로 임원숫자가 많은 자동차(55명) 등 일부 계열사에선 인사를
눈앞에 두고 거의 일손을 놓고 있는 상태다.

이번에 자리를 지킨 임원들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몇달 앞으로 다가온 주총때 신규 선임을 받지 못하면 그만이다.

이렇게 "소리없이" 나가는 임원들도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정기인사에서 직책 강등을 당한 임원들도 적지 않다.

모자동차회사의 상용사업담당 임원(전무)은 본부장을 겸임했으나 새로
부사장급이 본부장으로 오는 바람에 직책이 내려앉았다.

또다른 그룹의 모대표 부사장은 그룹내 다른 계열사 부사장으로 전보되면서
"대표"자를 뗐다.

직책이나 "대표"자가 의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종래 보기 힘들던 사례들
이다.

여기에다 기업들은 임원 TO제니, 직급 정년제니, 연봉제니 하면서 더욱
임원들을 "죄고" 있다.

임원들로선 이래저래 시련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 임원급에 대한 리스트럭처링은 지난해부터 예견돼 왔다.

최근 2~3년간의 거품 호황으로 각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임원 숫자를
늘려온 탓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임원들의 불만은 크다.

"경영의 최일선에서 회사만 바라보고 뛴 결과가 고작 이거냐"는게 골자다.

"임원이 되기까지 거의 가정생활조차 잊고 살았다. 그렇지만 회사가
어려우면 항상 제일 먼저 정리되는 게 임원 아니냐"라는 푸념은 별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서나 들을수 있다.

인사에선 언제나 떠난 사람도 있고 남은 사람도 있다.

떠난 이들은 그들대로,남은 임원은 나름대로 역할이 있다.

단 이것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될지 "살아남은 자의 영광"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 이의철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7년 1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