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경영에 "시나리오 기법"을 활용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다.

기업을 둘러싼 경영환경의 변화속도가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엔저"나 "원저"등 환율의 변동은 물론 "D램 가격 변동"과 같은 외부
변수는 모두 기업경영을 불안하게 만드는 "리스크"다.

더구나 이같은 경영환경의 변화 속도도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사태를 확인하고 대처하면 이미 때는 늦다.

미리 환경변화를 예측하는 "시나리오 기법"이 각광받는 이유다.

삼성그룹은 올 하반기 주력품목의 경기가 환율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고 반도체.가전.조선 등 각 품목별로 대미 달러 한율에 따른 대처방안을
마련중이다.

삼성은 특히 <>달러당 7백원대 <>7백50원대 <>8백원대 등 1안에서
3안까지의 시나리오에 따라 각 품목별 경쟁력 강화방안을 작성중이다.

삼성은 또 올 연말께로 잡았던 품목별 철수 일정을 오는 8월로 앞당겨
채산성이 맞지 않는 사업은 조기에 철수키로 했다.

삼성은 철수할 품목을 고르는 작업에서도 시나리오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자동차는 최근 지속되고 있는 엔저로 자동차의 대일 가격경쟁력이
급속히 떨어지고 있다고 분석, 엔화 환율변동에 따른 수출물량 재조정작업을
진행중이다.

이에 따르면 엔저가 10% 진행될 경우 국산차의 수출은 16%정도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는 이같은 분석에 근거해 앞으로 엔저 진행 양상에 따라 달러당
<>1백엔대 <>1백15엔대 <>95엔대 등 3-4가지 모델을 설정, 각 상황에
따른 신축적 대응방안을 먀련해 나가기로 했다.

LG그룹 계열의 LG칼텍스 정유는 오는 2000년까지 시설투자계획을
작성하면서 시나리오 기법을 활용했다.

앞으로 4년간 LG칼텍스 정유의 총 투자규모는 2조6천2백억원 규모.

LG는 "낙관" "비관" "중도"라는 세가지 상황을 고려해 각각의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투자규모와 자금 조달 계획을 수립했다.

시나리오의 내용 자체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지고 있으나 수백가지
경우의 수에 대한 분석과 전개방향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기업들이 이처럼 시나리오 기법을 활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경영환경의 변화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만 하더라도 정치상황이 유동적인 것은 물론 남북한문제 등이
기업경영의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남북 통일이 수년내 이루어진다는 가정하에 통일
이후 기업의 경영여건 변화에 대해 연구를 진행중이다.

시나리오 경영기법의 위력은 정유회사 더치셸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더치셸은 지난 68년 당시 유가가 안정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너지
위기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유가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73년 중동전쟁으로 실제 유가가 폭등하는 1차 오일쇼크가 닥치자
더치셸만이 이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덕분에 셸은 당시 7대 메이저중 매출액 최하위에서 2위로 올라섰으며
가장 이익을 많이 내는 기업으로 부상했다.

뿐만아니다.

역으로 시나리오를 예측치 못해 당하는 불이익을 감안해도 이 경영기법의
위력은 드러난다.

반도체 가격하락이란 외부 요인에 안이하게 대처한 국내 반도체 3사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지난해 말 개당 50달러를 웃돌던 16메가D램의 가격은 올들어 20달러로
내려가더니 다시 개당 14달러 수준으로 떨어졌다.

세계 최대 D램 공급업체인 삼성전자는 당초 매출계획을 21조로 잡았다가
서둘러 17조로 수정했으며 순익규모도 당초 3조원에서 1조5천억원, 다시
1조원, 이제는 6천억원대로 수정 전망했다.

현대전자와 LG반도체는 말할 것도 없다.

올초만 하더라도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이익을 낼 것으로
예상했으나 현재로선 이익은 커녕 적자만 면하면 다행이라는 판단이다.

이로인해 각 반도체 회사는 투자규모를 재조정 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으며 해당 그룹도 안정적인 사업구도를 위협받고 있다.

환경변화의 스피드를 감지하지 못해 대처능력을 상실한 데 따른 것이다.

시나리오 경영기법은 "모든 위험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이는 "어떤 위험도 미리 막을 수 있다"는 전통적인 "불조심 이론"에서
180도 발상의 전환을 한 것이다.

외부환경의 변화는 기업내부적으론 의사결정의 스피드를 강요하지만
또 한편으론 이같은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경영자에게 점점 더 많은 능력이 필요해지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의철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7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