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7년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카오스이론을 처음 주창한 벨기에의
일리야 프리고진교수가 대한화학회 창립 50주년기념 세계한민족 화학자
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했다.

프리고진교수는 22일 이화여자대학교 법정관 강당에서 "카오스:새로운
패러다임-필연의 종말"이란 주제로 첫 공개강연회를 갖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카오스이론의 의미와 전망을 피력했다.

서강대 이덕환교수(화학)의 자문을 받아 이날 강연내용을 요약.소개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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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연과학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개혁적인
변화가요구되고 있다.

안정성과 평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고전적인 자연과학은 이제
불안정성과 요동을 중심으로 진화적 특성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해야만 한다.

자연은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기하학적 시각이 아닌 서술적
방법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카오스(혼돈)이론은 이와같은방식으로 자연을 이해하는 새로운 도구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모든 사건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의 결과이기 때문에 예측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과 인간의 행동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생각 사이에 존재하는
"결정론의 딜레마"는 희랍시대부터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뉴턴의 자연법칙이 정립되면서 이같은 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뉴턴의 자연법칙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결정론적인 우주를 설명하는
것으로 미래와 과거가 똑같은 역할을 한다.

초기조건만 주어지면 자연법칙으로부터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과거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20세기들어 출현한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에서도 시간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으며 시간은 일종의 환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결정론적 특성"과 "시간 가역성"을 기본적인 골격으로 한 뉴턴의
자연법칙은 "필연"을 전제로 한다.

이런 자연법칙에 따르면 자연이란 원칙적으로초자연적인 존재인 인간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

이런 자연관은 기독교인의 신에 대한 인식으로 더욱 강화되었으며
자연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동양의 자연관과 명백하게
구별되는 것이다.

자연현상을 설명할 때에는 정보의 양에 따라서 "개체적"설명과
"통계적"설명이 가능하다.

고전과학에서 통계적 방법은 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경우에만
사용된다.

그러나 베르누이 사상과 같은 카오스사상의 경우에는 개체적 설명으로는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고 개체들로 구성된 집단을 통계적으로취급하여야
만 한다.

집단을 형성하는 개체의 거동으로는 집단의 거동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으며 현재의 상태로부터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카오스계의 특징이다.

이런 통계적 수준의 설명에서 과거와 미래가 명확하게 구별된다는
"시간의 방향성"이라는 개념도 자연스럽게 얻어진다.

카오스이론에 의하면 자연법칙은 더이상 필연적일 수 없고 확률적이어야만
한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중인 미시적 수준의 요동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고전과학의 입장에서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 물리세계와 사회 또는
정신세계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당연한
것이고 필연의 추구를 목표로하는 자연과학은 인문과학보다 우월한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카오스법칙의 출현으로 자연과학에서 조차 결정론적 필연이
불가능하게 됨으로써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구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인간을 기계적 존재로 인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을
능동적이고창조적인 대상으로 인식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자연에서의 물리현상에서 카오스와 불안정성이 자연의 진화를 가져오는
필요조건이다.

결정론적 관점에서 확률과 비가역성이 핵심인 카오스적 관점으로
옮겨감으로써 우리는 자연은 물론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도 보다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다.

과학은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산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염된
도시를 막게 하는 것이어야한다.

과학은 모든 사람이 문명의 혜택을 평등하게 누리고 폭력이 없는 미래의
이상향을 구축하는 데에 핵심적인 기여를 할 것이다.

<정리=김재일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