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변두리 인생의
일상을 가식없이 보여줌으로써 현대인의 밀폐된 자아를 드러낸다.

홍감독은 신인답지 않은 노련함으로 우리 사회의 이면을 하나씩
들춰내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

삼류소설가로 취급받으면서 끊임없이 절망하는 효섭 (김의성)과
그를 사랑하는 유부녀 보경 (이응경)이 중심인물.

이들 곁에는 보경의 남편이자 생수회사 직원인 동우 (박진성)와
소설가의 아내를 꿈꾸는 극장매표직원 민재 (조은숙), 그녀를 짝사랑하는
민수 (손민석)가 얽혀 있다.

이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와 남루한 현실이 있을 뿐 별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밤새워 쓴 원고는 출판사의 책상서랍에서 썩고 어쩌다 생긴 술자리도
파국으로 끝난다.

지방거래처에 내려갈 때도 옆자리에 탄 사람이 오물을 쏟아 기분을
잡치고 휴게소에서는 차를 놓쳐 낭패보기 일쑤다.

가난한 소설가에게 정성을 바쳐봐야 그의 관심은 유부녀에게 가 있고
의처증으로 고민하는 사내도 아내의 불륜을 확실하게 다잡지 못한다.

5명의 주인공이 때로는 주연 혹은 조연으로 역할을 바꿔가며 보여주는
삶의 모습은 엇갈릴대로 엇갈린 불균형의 모습이다.

효섭과 여행을 떠나기로 한 보경이 약속장소에서 기다리다 지쳐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대목은 삶의 겉모습만 보고 마는
우리네 일상을 상징한다.

질투심으로 효섭과 민재를 죽인 뒤 넋이 나간 민수.방안에서 벌어진
참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간 보경이 다음날 아침 신문을 거실바닥에
한장씩 깔고 그위를 걸어 베란다로 나가는 장면에선 일탈과 초월의
이미지가 엿보인다.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듯 창문을 열어제끼는 끝장면은 이상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 4일 코아아트홀 동아극장 개봉 예정 )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