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도체의 메이드 인 지구시대".

현대전자가 미국 공장 건설의 첫 삽을 떴다.

이로써 한국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생산 시대가 가시권에 들어섰다.

꼭 한 달뒤인 다음달 29일 삼성전자도 미국 공장건설에 착수한다.

LG반도체는 빠르면 오는 7월 말레이시아 페낭에 생산기지를 세운다.

반도체 사업 진출을 선언한 대우전자도 북아일랜드나 동남아에 생산기지를
건설한다는 계획을 조만간 발표키로 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조립업체인 아남산업은 올해안에 필리핀에 4번째
공장을 짓는다.

동시에 이스라엘과 대만에도 공장을 세울 방침이다.

그야말로 한국 반도체가 5대양 6대주에서 만들어 지는 "전방위 생산시대"에
접어드는 셈이다.

국내업체의 해외생산기지 건설이 갖는 의미는 미국이나 일본업체의 그것
과는 다르다.

13년의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상의 위치에 올라섰음을 확인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현대전자의 미국 진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현대는 지난 83년 회사 설립과 동시에 미국 샌호제이에 반도체 라인을
세웠다.

반도체 연구소를 짓고 여기에 시험라인을 깔았던 것.

시험생산을 거쳐 곧바로 현지에 양산공장을 세운다는 야심찬 청사진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의욕은 좌절로 이어졌다.

기술을 주겠다는 사람이나 회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84년 연구소와 생산라인을 거둬들이고 패배감만 안은채 한국으로
철수해야 했다"(정몽헌 현대전자 회장).

"그 패배감은 기어코 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를 불러 일으켰다"(김주용
현대전자 사장).

그 오기가 철수 12년만에 다시 미국에 "입성"하는 열매를 맺는데 밑거름이
된 셈이다.

더구나 무명의 업체가 아닌 세계 5위의 메모리 반도체 회사라는 당당한
명함을 내밀면서.

삼성전자도 마찬가지다.

삼성은 지난 82년 미국 마이크론 테크놀러지사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반도체 사업 진출을 위해 기술연수를 받으러 간 것이었다.

그러나 연수는 커녕 따돌림만 당하다가 돌아왔다.

그러나 상황은 멋지게 반전됐다.

미국의 각 주정부들은 삼성의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삼성은 지원자가 너무 많아 곤란할 지경이었다.

결국 텍사스주 오스틴시를 골랐다.

세제혜택 등 우대를 받아낸 것은 물론이다.

"귀찮은 손님"에서 "최고의 VIP"로 화려하게 변신한 것이다.

국내업체들은 글로벌 생산기지 구축을 통해 구겨졌던 "자존심"을 되찾았다.

해외생산의 기대효과는 크게 세 가지다.

<>유저 프렌들리(user friedly)정책 <>기술개발의 효율화 <>덤핑시비
등 무역공세 차단이다.

유저 프렌들리 정책이란 수요자 지향의 생산과 마케팅을 하겠다는 것.

"반도체의 주소비자인 컴퓨터.전자업체들 간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납기를 단축하고 다양한 제품을 동시에 발주하는 등 주문조건이 날로
까다로워지고 있다. 이같은 수요자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면 그들과 한 지역
에서 생산하는게 가장 효과적이다"(김치락 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

다시 말해 수요자가 원하는 대로 다해주는 대신 영원한 고객으로 붙잡아
두겠다는 것이다.

기술을 효율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는 잇점도 있다.

효과면에서 "유저 프렌들리"에 버금간다.

전자기술과 반도체 기술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서로를 견인하며 발전한다.

국내업체의 메모리 반도체 기술은 세계 최고다.

반면 세트 제조기술은 취약한 부분도 많다.

따라서 해외 생산기지는 두 기술을 접목하는 가교의 역할을 할 수 있다.

"해외 생산기지를 가동할 경우 시스템 기술과 연관된 비메모리 반도체를
개발하기 쉽고 또 그 제품을 현지에 되팔 수가 있다"(이윤우 삼성전자
사장)는 계산이 나온다.

또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무역공세를 원천 봉쇄해 마음놓고 생산할 수 있게
됐다는 것도 큰 메리트로 꼽을 수 있다.

국내업체는 맨손으로 땀과 눈물을 흘리며 일궈낸 반도체 신화 위에
"글로벌 생산시대"라는 새 그림을 덧칠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한국"의 대야망을 달성해 낼 "화룡점정"의 마무리 붓이 될지 주목
된다.

<유진(미오리건주)=조주현기자>

(한국경제신문 1996년 2월 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