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때로 미움이 된다.

기쁨과 슬픔의 뿌리도 따지고 보면 한 줄기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은 "창과 벽이 등을 맞대고 있는 방"에 비유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 "방" 안의 빛이 어둠의 문턱에 걸려 굴절되는 경우다.

"레이피스트"는 굴절된 사랑으로 고통받는 한 청년의 심리를 그린
영화다.

정상적인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욕구가 어떻게 뒤틀려 나타나는
지를 잔잔하게 묘사했다.

영화의 기법은 "이중 훔쳐보기".

얼마전 개봉된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 망원경에 의한 관음증을
소재로 한데 비해 이 영화는 캠코더를 매개로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훔쳐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비디오로 담아 재생시켜
보면서 그러한 자신의 모습까지 화면에 끌어 들인다.

닫힌 내부를 외부의 빛으로 되비춰보는 셈이다.

갓 스무살의 순진한 청년 루카는 맞은편에 사는 여인 발레리아를
짝사랑하며 그녀의 모습을 비디오에 담는다.

그러나 그녀는 좀체 가까워지지 않는다.

어느날 밤 자동차 앞문이 고장나 헤매는 그녀를 보고 그는 격정에
못이겨 강간하고 만다.

실신한 그녀를 두고 아파트 방으로 돌아온 그는 평정을 찾은 뒤
구급차를 부르고 다시 내려가 깨어나도록 도와준다.

그는 강간범인 동시에 구원의 남자가 된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면서도 신체적 접촉에 실패
할때마다 되살아나는 폭력성에 시달린다.

원숙미를 지닌 연상의 여인 로레나마저 등을 돌리자 그는 더욱 광폭
해진다.

시간이 흐른뒤 발레리나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얻고 비로소 감미로운
섹스를 맛본 그는 그러나 그날밤의 "짐승"이 바로 루카임을 깨달은
그녀 앞에서 절망한다.

영화는 그가 로레나의 총에 의해 최후를 맞는 것으로 끝난다.

주인공 루카는 폐쇄성과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

이 작품은 그의 의식세계와 캠코더속의 여자들을 이중으로 보여주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숨겨진 방을 되돌아 보게 만든다.

( 9일 뤼미에르/피카소/영등포 극장 개봉 예정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