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흑백화면에
비치는 전태일의 생애와 침묵이다.

이 영화는 한 인간의 삶이 얼마나 치열한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는가를
무수한 말없음표로 보여준다.

영화는 운동권출신 김영수(문성근)가 전태일(홍경인)평전을 쓰기
위해 그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박광수감독은 이를 단순한 전태일일대기로 복원하는 데서 한걸음
나아가 영수의 애인인 여공 신정순(김선재)과 그들 사이에 태어날
생명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고자 한다.

시간대도 전태일이 분신한 70년겨울과 수배중인 김영수가 쫓기며
살아가는 75년, 청계천노동자의 오늘을 비춘 90년대까지 아우르고
있다.

감독의 의도는 과거와 현실을 흑백, 컬러로 대비시킨 화면구도에서도
찾을수 있지만 냉혹하리만치 절제된 연출기법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그는 "투사"로서의 전태일과 "인간" 전태일의 면모를 어떻게
연결시킬지를 놓고 무척 고심한 듯하다.

70년대와 90년대의 시대인식이 다른데다가 관객들의 수용태세 또한
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화면 곳곳에 고도로 계산된 여백을 배치했다.

전태일의 투쟁도 외침보다는 낮은 목소리로 가라앉혔다.

점심을 굶는 여공들에게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통금에
쫓겨 수유리까지 뛰어다니는 모습은 그 어떤 투쟁장면보다 호소력을
지닌다.

이같은 방식은 강렬한 투사로서의 이미지를 기대한 관객들을 안타깝게
할지도 모르지만 바로 이것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가장 아름답게
하는 요소로 보인다.

청계천에서 전태일평전을 들고 지나가다 무심코 돌아보는 95년의
노동자 모습에 환하게 웃고 있는 전태일이 겹쳐지는 마지막 부분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 18일 서울/씨네하우스/녹색/롯데월드/동아극장 개봉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