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지금 재계는 폭풍전야다.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숨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이목은 검찰의 소환이 어느 정도 진폭(파고)을 그릴지에 쏠려 있다.
재계에서 회자되는 "소환대상 기업(그룹)"은 많다.
적게는 10개에서 많게는 52개사에 이른다는 설까지 떠돌고 있다.
관례였다고는 해도 노씨에게 재임기간중 "떡값"을 건네준 기업은 일단
수사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산술 계산"에 근거한 것이다.
검찰의 "메스"를 기다리는 기업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설마"속에 추위를 타는 기업도 없지 않다.
특히 비자금을 실명 전환해 사용하는등 깊숙한 "커넥션"을 맺어온 한보같은
그룹들은 완전 초비상상태다.
검찰의 주요 수사타겟이 이 부류의 기업들에 집중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물론 의혹대상 기업들은 강하게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H그룹 자금담당 임원은 "(괴자금 사용설은) 한마디로 낭설이다.
대기업들은 아무리 사업자금이 아쉽다고 해도 아무돈이나 끌어 쓰지는
않는다. 금리가 싸다고 다 좋은 돈은 아니다. 소스(출처)가 분명치 않은
돈은 절대 빌려쓰지 않는다는게 확고한 불문율이다"고 해명했다.
K그룹 자금관계자는 "설령 노씨 자금을 끌어 쓴 기업이 있더라도 일괄적
으로 단죄해서는 곤란하다. 노씨측이 제시한 금리는 시중의 3분의 1선인 연
6%였다. 한계상황에 있는 기업들로서는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선의의 피해자는 가려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부분 그룹이 공통적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사안은 "이권 거래형"
비리의혹에 대한 검찰의 수사여부다.
율곡.수서.원전 등 이른바 6공 3대비리를 비롯한 각종 국책프로젝트와
신규사업 인.허가 과정에서의 "사례금"수수에 대해 검찰이 어느 정도 수사의
칼날을 들이댈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관련 기업들은 대체적으로 "우린 켕길게 없다"는 반응이다.
적어도 겉으론 그렇다.
기업들의 이같은 반응속엔 "과거지사를 갖고 기업들을 마구잡이로 소환
조사하는 무차별식이 돼서는 안된다"(D그룹 K전무)는 강한 반발과 경계가
담겨 있다.
S그룹 L이사는 "6공시절에 이뤄진 의혹사업을 뒤지자면 한도 끝도 없다.
단적으로 골프장 건설만 해도 1백39건에 이른다.
여기에 각종 국책 프로젝트와 인.허가 사업까지 들어가면 여간 복잡하지
않다.
과거지사를 갖고 재계를 온통 들쑤셔 놓아서는 누구에게도 이로울게 없다"
고 말했다.
L그룹 L전무도 비슷한 톤이다.
"요는 노씨 비자금건에 대한 수사의 궁극적 겨냥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노씨의 개인비리를 캐는게 주안점이 돼야지 애꿎게 기업들이 줄줄이
꿰어들어가는 양상이 돼서는 곤란하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상황논리를
감안해야 한다. 문민정부들어 기업의 권력형 비리는 눈을 씻고도 찾기
힘들어진게 사실 아니냐. 모처럼 재계가 새 풍토를 일궈가고 있는터에 굳이
예전의 아픈 상처를 들어낼 필요가 있겠는가"는 주장이다.
H그룹 K이사는 "5공시절 "정도"를 고집하다가 통째로 쓰러져버린 국제그룹
을 생각해보라. 상황이 "상납"을 강요하는데도 독야청청을 외치다 망하는게
옳은 일만은 아니다. 기업은 계속 성장해야 하는 존재(going concern)이지
않은가"고 지적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사부재리 이론"을 내세우는 측도 있다.
굵직한 6공의혹건은 문민정부들어 부분적이나마 한차례의 검증과정을
거쳤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특히 한국전력 원전입찰과정에서의 비리와 관련해서는 김우중(대우) 최원석
(동아)회장등 대기업그룹 총수와 박기석삼성건설회장 등 상당수 최고
경영자들이 법정에 올라 벌금형을 선고받는 "속죄 과정"을 거친 바 있다.
더구나 현 정부는 이들 해당 기업인들을 최근 "광복 50주년 기념 대사면"
대상에 포함시킨 바 있다.
법리상으로도 "없던 일"이 돼버린 셈이다.
재계가 "노태우 커넥션"에 대한 파장이 크지 않을 것으로 낙관하는 근거는
또 있다.
정부의 각종 정치.경제 일정이 임박해 있다는 것이다.
오는 13일 강택민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국빈 방문하는 것을 비롯해
15일부터는 일본 오사카에서 APEC(아.태경제협력체)지도자및 각료회의가
열린다.
최소한 이들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국내 정세를 "치리정돈"해야 할
것은 불문가지다.
또 오는 7일엔 삼성그룹이 주관하는 한 대형 행사에 김영삼대통령이 참석
한다.
물론 이건희회장도 모습을 나타낸다.
이 자리가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이전에 "커넥션"에 대한 문제는
가닥을 잡지 않겠느냐는게 재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렇게 보면 검찰이 재계의 연루사안을 놓고 오래 끌 시간이 없다는 재계의
관측은 일응 설득력을 갖는다.
재계는 기껏해야 이번주말, 늦어도 내주 중반까지는 "수사 구도"가 완전히
제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고 있다.
어쨌든 "통과의례"를 위해서라도 조만간 기업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태풍
이 불어닥칠 것만은 분명하다.
재계는 이런 저런 관측속에서 그 태풍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 재계는 폭풍전야의 고요속에서 갖가지 "경우의 수"에 대비한 준비에
부산하다.
한마디로 정중동이다.
< 이학영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11월 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