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3일 오후 부산 외항. 앞바다를 빽빽이 메우고 있던 선박들에
돌연 "소개령"이 떨어졌다.

텅빈 바다에서 육중한 한척의 배가 서서히 "행차"를 시작했다.

길이 268m,폭 43m의 LNG(액화천연가스)수송선이었다.

이 배는 한진중공업이 건조한 LNG 3호선인 "한진평택"호.막 시운전에
나서는 참이었다.

한진평택호가 부산앞바다를 일시에 텅 비우며 행차에 나선 것은 기념사진
촬영을 위해서였다.

조중훈한진그룹 회장이 직접 항만청측에 부산앞바다를 "정리"해 줄 것을
부탁했던 것.

고부가 대형선박의 상징으로 꼽히는 LNG선은 이처럼 조선업체들에
자부심과 선망의 대상이다.

우선 가격면에서 다른 선박을 압도한다.

한 척 값이 약 2천억원이나 된다.

30만t급 초대형유조선(VLCC)3척 값과 맞먹는 수준이다.

물론 기존의 어느 선박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도의 건조 기술이
필요하다.

LNG선은 폭발위험성 때문에 선가보다 안정성이 더욱 강조되는 특수선이다.

영하 163C의 가스를 싣고 20년이상 장기적인 수송을 해야 한다.

내부절연 화물탱크용접 선형디자인 등의 최첨단 기술이 없이는 꿈도 꿀 수
없는 조선업계의 "신프론티어 제품"이다.

컨테이너선이나 유조선등이 워키토키라면 LNG선은 최첨단 기능의 휴대폰에
비유할 수 있다.

업계에선 LNG선을 "산업의 종합예술품"으로 부른다.

전자 화학 기계 등 기존 산업의 첨단 기술이 총동원해야 한 척의 배를
지을 수 있어서다.

이처럼 엄청나게 기술이 투입되다 보니 한 척을 짓는데 보통 3천억원은
든다.

배값으로 받는 2천억원보다 1천억원이 더 들어간다.

엄청난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도 국내 조선업체들은 LNG선이 신규 발주될 때마다 "한 건"을
따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

단지 비용으로만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기술축적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한번 건조실적을 쌓고 나면 추가 건조때 비용이 체감되는 효과도 있다.

한진은 현대중공업에 이어 국내 조선사들중 LNG선을 자기 실력으로
건조해낸 두번째 회사다.

지난해 6월 LNG 1호선인 "현대유토피아"호가 뱃고동을 울린 이후
2,3,4호선은 고스란히 현대의 몫으로 돌아갔었다.

대우 삼성 한라중공업등 다른 회사들이라고 LNG선 수주경쟁에서 손을 놓고
있을리는 만무다.

이들에게도 기회는 다가오고 있다.

한국가스공사가 인도네시아로부터 1백만t, 카타르로부터 2백40만t의
LNG를 도입키로 함에 따라 후속 5~9호선 발주가 임박한 것.

빠르면 올해말께 일괄 발주가 실시될 전망이다.

LNG후속선 수주를 둘러싼 선발사와 후발사간의 자존심 싸움은 이미
불붙었다.

후발업체들은 무조건 거액을 투자해놓고 보자는 식으로 "배수진"을 치고
있다.

"LNG선 실물모형과 연구동을 짓는데만 1백억원을 투입했다"(이해규
삼성중공업사장).

대우중공업도 50억원을 들여 LNG선의 차세대 추진장치인 재액화장비와
전기추진 시스템 등을 개발중이다.

선발사들이라고 손놓고 있을 리는 없다.

현대는 핵심기술 국산화를 통한 제조원가 절감으로 "독주체제"를 다지고
있다.

지난 9월말에는 자체 개발한 스팀터빈 엔진을 LNG 4호선에 탑재했다.

대당 1백억원짜리다.

"LNG1호선을 건조할 때의 국산화율은 50%대였으나 건조중인 4호선은
80%를 넘게될 것"(이철희현대중공업 특수선박부장).

한진도 기술제휴선인 프랑스의 아틀란티크조선소로부터 LNG 핵심 기술을
전수받는등 추가 수주를 위해 칼을 갈고 있다.

한바탕 거센 회오리를 예고하고 있는 "LNG선 수주전쟁"은 국내 조선업계에
기술수준의 한단계 도약을 안겨주는 전기가 될 게 분명하다.

고작해야 유조선등 기존 선박의 "박리다매"에 안주해 온 국내 조선업계의
체질개선 기회로 이어질지도 관심이다.

한국 조선업계는 과연 기술 도약의 새 터닝포인트를 넘어서고 있는 것일까.

<심상민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10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