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사가 대졸엘리트의 인기직장으로 부상한 것은 지난 80년대말.

그이전만해도 투전판이라는 부정적인 선입견 때문에 기피직장이었다.

그나마 미래를 보고 증권계에 투신한 대졸 출신자들도 증권거래소나
증권감독원을 지망했다.

양적인 성장과 함께 인력난에 시달린 증권사의 인재 충원처중 하나가
증권관련기관이 된 것은 당연했다.

증권거래소에서 증권사로 옮긴뒤 현재 국제부문 임원들로 활약중인
4인방으로 LG증권의 임윤식이사(48),대우증권의 강창희이사(47)선경증권의
이종윤이사(48),쌍용증권의 박원훈이사(45)를 손꼽을수 있다.

지난 80년 거래소 조사과장에서 럭키증권 조사부장으로 옮긴뒤 84년이후
국제업무를 맡아온 임이사는 85년 정부의 해외증권 발행규정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실사단원들과 함께 1주일간의 수소문끝에 일본도 자본시장 개방화
초기에는 자국 증권사를 사실상 보호했다는 문건등을 발견,국내기업이
해외증권을 발행할때 국내증권사를 간사단에 포함시켜야한다는 규정을
만드는데 한몫을 했다.

임이사는 해외에서 수집한 해외증권발행 양식및 절차등을 담은 "해외증권
발행 실무"란 책을 발간,국제영업실무진들의 지침서가 되게 했다.

지난 77년 대우증권 해외조사과장대리로 전직한 강이사는 지난 84년
7월 증권업계 최초의 해외사무소인 동경사무소 설립준비위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약 20평의 허름한 사무소를 구하고 아르바이트 여직원을 채용했는데도
연간 운영비가 1억원에 달했다.

"당시 사장님께 이를 보고하니 "지난해(93년도)당기순이익이 8천만원인데
자네가 1억원을 쓰는군"이라고 말씀하셨다.

광주사태와 세계 4대 채무국이라는 나쁜 이미지로 일본 기관투자자들로
부터 "한국에도 증시가 있습니까"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받거나 애써
만들어 갖다준 자료도 내가 떠나지말자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현지
상황에서 이말은 비수로 꽂혔다"

증권거래소 이차장이 선경증권 국제담당이사대우부장으로 전신한 때는
지난 92년초. 당시 국제영업실적은 22개사중 10위권내외였다.

처음부터 다시시작한다는 각오로 미국증권분석사,미국공인회계사등의
인재를 안팎에서 끌어모았다.

이듬해인 93년초부터 영어 일어를 우리말 같이 구사하는 직원,증시및
경제전반 시황담당 직원등 각기 주특기가 다른 5-6명으로 팀을 구성,
일단주문을 염두에 두지않고 외국의 펀드매니저들을 상대로 한국증시
시황에 대한 설명회를 연중 가졌다.

성의있고 실력있는 증권사라는 인식이 퍼졌는지 1년이 지나자 외국인의
대량주문이 쇄도했다.

취약지역이었던 스위스시장 공략을 위해 3개월간의 야근준비후 1개팀을
파견,12개시를 돌며 과학적인 투자기법과 모델을 알린 결과 20-30곳의 투
자기관으로부터 연간 1천억원대의 주문을 받을수 있었다.

이에따라 영업실적도 94년말 해외주문 유치 3위,해외증권 인수 2위로
성큼 뛰어올랐다.

쌍용증권에 지난 84년 입사한 박이사는 지난 91년초 싱가포르 정부의
소개를 받아 동남아의 회교부국인 브루나이 투자청을 고객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찾아갔다.

떠나기전 만날 약속을 하고 갔지만 정작 투자청 간부는 "시간이 없는
것도 신의 뜻"이라며 귀찮다는 뜻을 암시했다.

이대로 주저앉을수는 없는 일.투자청을 무작정 찾아가 수위를 통해
비서에게 사정을 간곡히 전했다.

호텔에서 사흘째 기다리던중 "OK"연락을 받고 가까스로 만나 한국증시를
설명하고 투자를 권유했다.

브루나이 투자청은 그후 각종 자료 제공과 직원들의 후속방문이후 국내
주식 매입을 결정,현재는 동남아에서 거래규모 3위의 대형고객이 됐다.

<최승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