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증권사 국제영업맨들이 전세계를 무대로 꺼리낌없이 뛸수 있게 된
뒤안길에는 지난 80년대후반에서 90년대초까지 체면과 사생활을 버린채
"25시간"을 일했던 "개척자"들의 피눈물이 배어 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오직 "할수 있다"는 신념과 "목숨 걸고
팔아라"는 명령속에서 국제영업의 기초를 닦는데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던 고위 간부로 동서증권의 양호철부사장(40)과 대우증권의
이세근전무(52)를 손꼽을수 있다.

동서는 지난 90년 국내 건설사중 처음으로 변동금리부사채 1억달러
전환사채 5천만달러 규모의 동아건설 해외증권발행을 맡았다.

"이미 한국증시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이 식은데다 리비아와의 특수한
관계로 미국계 증권회사및 투자자들의 인수는 기대할수 없었다.

게다가 발행조건도 무보증이어서 어려움은 더했다"(양부사장) 지난
85년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 교수에서 증권맨으로 전신한뒤 국내최초로
삼미특수강에 대한 주식인수권부사채(BW)발행 주간사를 획득하는등
국제인수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왔던 양부사장의 난국타개책은 "읍소"와
"으름짱"이었다.

각국의 증권사및 은행 관계자를 상대로 출장및 전화를 통해 "이번에
도와주면 후사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재미 없다"고 회유한 끝에
겨우 물량을 소화할수 있었다.

양부사장에게 있어 91년초 코리아아시아펀드(KAF)발행 연기결정은
최대의 시련이었다.

KAF펀드 주간사로 1억달러를 공모하기 위해 로드쇼(투자설명회)까지
마쳤는데도 한국 증시침체로 매수세력이 전혀 없었다.

발행을 강행할 경우 유통시장에서의 폭락은 "명약관화"한 상황.

"정부가 인가한 펀드의 발행을 사상 처음으로 연기할 경우 곧
''괘씸죄''로 연결될수 있어 고민을 거듭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결국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고 연기의
불가피함을 정부에 알린뒤 회사돈만 날린채 짐을 챙겼다"

몇개월후 KAF를 무난히 발행하고 나서야 그는 그당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주위로부터 확인받을수 있었다.

대우에서 지난 85년이후 현재까지 국제분야업무를 맡으면서 국내
1위 증권사로서의 성가 유지에 기여해온 이세근전무의 수난시기는
(주)대우의 1억5천만달러짜리 주식인수권부사채 발행을 추진했던
지난 91년 12월.

"한달후면 한국증시에 대한 직접 투자가 가능한 시점인데다 시황도
나빴다. 그러나 그룹측의 자금사정상 발행이 꼭 필요했기에 연기도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공동주간사를 맡았던 노무라 바클레이즈증권마저
자기몫의 대부분을 인수하지않겠다고 꽁무니를 뺐다.

이바람에 전체의 80%가량을 책임져야 했다.

각국의 27개 인수단을 상대로 "결코 손해보지 않게해 주겠다"고
집요하게 회유한 끝에 물량을 넘기고 나니 주가가 하락하는 이중고가
닥쳤다.

시장조성차원에서 재매입한뒤 수개월뒤에야 가격이 올라 그때서야
가슴을 쓸어내릴수 있었다.

"지난 87년 새한미디어 전환사채를 발행하기 직전 충주공장이 전소,
3백여만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아찔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물에 대한
외국시장의높은 인기속에서 화재로 인한 결정적 타격은 없으며 회사의
우수성을 강조,발행에 성공한뒤 자신감이 붙었다"

경영전반을 총괄하는 양부사장과는 달리 현재도 국제업무를 직접
지휘하고 있는 이전무는 인도와 중국시장에서 외국증권사를 상대로
한판 승부를 준비중이다.

<최승욱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8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