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천재선언"을 들고 충무로에 돌아왔다.
20여년간 19편의 영화를 연출, 독보적인 위치를 굳혀온 그는 아직도
스스로를 "아마추어리즘의 작가"라고 표현한다.
"80년대의 "바보선언"이 권위주의사회를 향한 비판이었다면 90년대의
"천재선언"은 우리내부의 적을 겨냥한 풍자극입니다"
"아주 수상한 코미디"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 작품은 10년주기로
변화하는 그의 영화인생 궤적을 잘 읽게 한다.
64년 홍익대미대에 입학한 그가 강의실보다 학교앞 주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자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신상옥감독의 신필름에
데리고 간 것이 65년.
엉겁결에 배우 대신 연출을 하고 싶다고 말하고 신필름에 입사,
영화계와 첫 인연을 맺는다.
이후 신상옥 감독의 "무숙자" "내시" 제작에 참여하다 10년째인 74년
"별들의 고향"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으로 대종상 신인감독상을 받은 그는 한때 대마초사건에 연루돼
문공부로부터 4년동안 감독자격을 박탈당하는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바람불어 좋은날"로 새롭게 변신한다.
"어둠의 자식들"에 이어 "바보선언"을 내놓은 것이 84년.
"영화의 생명력인 직관과 창의력은 기발하면 할수록 위험도 크죠"
이 영화는 당시 그에게 국내에서의 냉대와 해외에서의 극찬이라는
명암을 동시에 안겨줬지만 결과적으로 "천재선언"을 탄생시키는 모태가
됐다.
"현실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것이 곧 한국적 영화문법"이라고 강조하는
그는 민주화투쟁열기가 뜨겁던 80년대에 이른바 "사회파 영화"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투영시켰다.
그결과 그는 영화판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민주감독"이자 충무로의
"대안"으로 평가받았다.
"천재선언"은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내놓은 새로운 대안인 셈.
"역시 "내 영화"로 승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직배영화에 대한 방화의 경쟁력도 마찬가지죠. 10년후를 내다보고
싸워야 합니다.
"천재선언"의 주인공 이름을 "수상한 소리" "이상한 빛" "알수없는
눈물"로 정한 것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자 한 때문이죠.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해외진출의 또다른 전략입니다"
해방동이인 그는 배우 최은희씨의 주례로 72년 박규애씨와 결혼,
딸 보람과 아들 누리를 두고 있다.
부친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뒤 한때 영화검열관으로 일했던
이윤성씨.
여동생 이혜경씨의 남편이 민주당 국회의원인 유인태씨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