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안길용씨가 사장자리에 올랐을 때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 정말 잘된 일"이라고 자기일 처럼 반가워들 했다.

증권계의 원로들은 그의 인간됨에 높은 점수를 주었고 젊은 직원들은
증권회사에 드디어 공채시대가 열렸다며 그의 등장을 축하했다.

안사장이 증권회사에 입사한 것은 지난 73년,지금은 선경증권으로
이름을 바꿔단 구동방증권이었다.

증권시장은 도박장이요 증권회사는 투기꾼들의 집합소같이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3명이 1기 공채시험에 합격했지만 증권계에는 그만이 남아있다.

3선개헌 반대다 유신헌법 철폐다하는 대학가 데모의 와중에 서울대
법대를 늦깍이로 졸업하고 본인의 말대로라면 학교 동창들이 없는
직장을 찾다보니 증권회사밖에 갈 곳이 없어 증권맨이 됐다.

그러나 23년만에 사장자리에 올라 그의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잘못된것은
아니었다는 평가를 할수있게 됐다.

오랬동안 대신증권에서 일한 연유로 증권가에서는 대신증권 인맥으로
분류된다.

그가 제일먼저 찾아가 사장 취임 신고를 한 곳도 재경원이나 증감원이
아닌 대신증권 양재봉 회장 사무실이었다는 후문이다.

그는 증권 경력의 대부분을 주식영업이 아닌 인수공모쪽에서 일했다.

채권 발행,주식인수,기업 공개등 인수 공모쪽에서 미친듯이 일했고
실력을 입증했고 그래서 사장이 됐다.

지금은 증권사의 핵심기능으로 자리잡은 인수업무지만 그가 일선에서
뛰던 당시만해도 회사채 발행등 인수 영업은 미개척의 영역이었다.

발행기관측 관계자들이 증권회사에서 왔다면 만나주지를 않아 매일
새벽을 아예 집으로 찾아 다녔다.

비오는 새벽을 남의 집 처마밑에서 보낸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서울 지하철 공채 1회 발행을 주선한 것은 지금도 그의 가슴속에
흥분으로 남아있다.

회사채 발행을 주선하기 위해 전국의 공단을 안가본 데가 없이 돌아다녔고
중소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입이 헤지도록 순회 설명회를 해댔다.

우리나라 기업중 그의 손을 거치지 않고 회사채를 발행한 기업이 없을
정도였지만 끝내 열리지 않았던 문은 오직 삼성 그룹이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결국 단한건의 인수실적도 올리지 못한 채 대신증권을 그만두었고
동양증권으로 옮아온 후 다시 도전해 기어이 삼성정밀 공개 주간사를
따내 원을 풀었다.

그는 집요하고도 융통성이 없는 그런 사람이다.

그가 지점에서 투자자를 대상으로 주식영업을 한 기간은 불과 2년 남짓.
그것도 상사와 정면으로 충돌해 지방으로 쫓겨 내려갔던 기간이었다.

대신증권을 공중분해 상태로까지 몰아갔던 횡령사건의 주인공 박황씨가
영업부장으로 있을 당시 횡령을 눈치챈 그가 제동을 걸었고 울산지점으로
밀려갔던 것이 지점 경력의 전부다.

박황씨 뿐만아니라 그에게 걸려들어 비판받지 않았던 상사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타협할 줄 모른다고도 말한다.

그가 대신증권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당시 양재봉 사장의 아들인
양회문씨(현 대신증권 부회장)를 공채시험 서류전형에서 떨구었던 이야기
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어렴풋이 사장의 특수 관계인이라고 알고는 있었지요. 그러나 과장
주제에 뭐 개의할 필요가 있나요"라고 그는 옛일을 회고하고 있다.

자네를 밀어낸 안사장이지만 양회문씨는 그를 친형처럼 좋아한다.

술을 마시다 흥이 나면 바지를 벗어 던지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지만
정작 그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다.

부하 직원들에게도 책상만 내려다보면서 말할 때가 많다.

보조개가 약간 들어가는 얼굴의 그는 사장이 되고서도 여전히 부끄러움을
타는 모습을 보여준다.

< 정규재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5년 6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