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난해3월21일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연구소는 굳게 닫힌
문을 활짝 열어 제쳤다.
엑센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개발주역들은 엑센트에 씌여있던 커버를 벗겨내면서 환호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이충구부사장.그는 그러나 환호보다는
감회에 젖었다.
"우리가 1백% 독자기술로 승용차를 개발했다"는 현실이 아무래도
꿈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부사장은 현대자동차,아니 한국자동차 설계기술의
바이블을 만든 장본인이다.
바이블은 속칭 "이대리 노트"로 불린다.
이대리 노트의 원전은 이탈디자인이었다.
이탈디자인은 "쟁이"라면 누구라도 가보고 싶어하는 이탈리아의
설계명가이다.
이야기는 이 설계명가에서 시작된다.
때는 1973년10월.현대는 포니 설계용역을 이곳에 맡기면서 5명의
"연락병"을 파견했다.
이대리는 그중 한사람이다.
연락병의 임무는 작업을 참관하면서 진척상황을 본사에 보고하는
것으로 돼있었다.
그러나 이대리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깡그리" 베끼기 시작했다.
"카피머신병"으로 바뀌었다.
기술을 배워 베낀게 아니다.
"정식으로 설계기술을 가르쳐 주겠습니까. 어깨너머로 훔쳐보는 수
밖에요"(이부사장)
낮에는 훔쳐보고 밤에는 인근 하숙집에서 훔쳐본 기억을 더듬어 노트에
옮겼다.
그는 이렇게 주경야독을 1년이상 계속했다.
그때의 우리자도차산업은 말 그대로 유아기였다.
기술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계도면과는 전혀 다른 차체도면을 어떻게 작성하는지도 몰랐다.
한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하는 일이라곤 그저 외국에서 개발한 차를 들여다 부품국산화에만
신경을 썼다.
SKD(Semi-Knock Down)방식,말하자면 외국의 선진업체에서 거의다
조립된 차를 들여다 타이어 범퍼 같은 간단한 조립과정을 거쳐 자동차를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상공부가 만든 자동차제조공장 허가기준도 "외국과 기술제휴한 업체로
제휴선이 제품의 성능을 보장할수 있는 조건을 구비한 업체"였을
정도다.
상황이 이랬으니 업계로선 제휴선 잡기가 최대의 관심사일수밖에.기술만
준다면 어느나라 업체건 지분율이 얼마건 상관 않았다.
기술을 구걸하다보니 외국자동차업체와의 합작도 그들의 사업에
들러리를 서는데 불과했다.
GM과 합작한 신진자동차의 예가 그랬다.
GMK 새한을 거쳐 83년 대우가 경영권을 인수했으나 GM은 여전히
대우의 뒷다리를 붙들었다.
92년 GM과 결별할 때까지 대우자동차는 GM의 국제분업체계의 한부분이었을
뿐이다.
GM이 놓아둔 덫에 걸려 대우는 올해야 겨우 유럽에 수출이 가능했다.
GM뿐만이 아니다.
불발로 끝나기는 했지만 현대자동차의 경우도 포드와 50대 50의
합작에 서명까지 했었다.
1970년의 일이다.
합작회사의 지분을 50%까지 내주기로 한 것은 물론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출지역제한과 사업영역을 둘러싼 양사간의 마찰로 합작사설립은
무산되고 말았다.
"포드와의 결별이 약이 됐다"(정주영현대그룹명예회장)고 말할 정도로
외국의 메이저들은 50%의 과실 따가는 것만이 중요했을 뿐이다.
기술 주고 사업을 키워주겠다는 마음은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우리 손으로 설계한 엔진들이 잇따라 개발되고 있다.
1백% 독자기술의 승용차에 전기자동차 태양광자동차등 차세대자동차도
선보이고 있다.
안전기술도 그렇다.
세계 1백98개국에 한국산차가 굴러다닌다.
한국의 기술을 뽐내면서.개도국에 한국자동차를 KD방식으로 내보내
로얄티를 거둬들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 핵심기술에는 부족한 것이 많다.
지난해 완성차업체들의 로열티지급액이 4천만달러에 달했다는 것이
우리의 수준을 잘 말해주고 있다.
대우가 세계적인 연구회사인 IAD사의 영국연구소를 사들이고 자동차
회사라면 너나 할것 없이 미국 일본 유럽등 선진국에 연구소를 세우는등
현지개발체제를 갖추느라 야단들이긴 하나 기술자립은 그리 쉬운게
아니라는 얘기다.
덩치를 키우는 설비증강 못지않게 연구개발에 돈을 쏟아 부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김정호기자>
(한국경제신문 1995년 4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