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창] (2) 해금 김영재씨..한맺힌 가락에 반해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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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 해금은 또 다른 나였습니다.
괴롭고 슬픈 때면 해금이 대신 울어주었고 기쁘고 즐거울 때면 해금이
신이나 노래했지요" 김영재씨(47.전남대국악과교수)는 나쁜 길로 빠지기
딱좋았던 사춘기시절 자신을 붙들어매준 해금소리와 그 가락과 함께 30년을
살고 있는 예인이다. 지영희(1909~79) 신쾌동(1910~78)선생에게 해금과
가야금을 사사해 두 사람이 사라진 80년대 이후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명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서라벌예대 경희대음대대학원을 거치며 서양음학도
전공했던 그는 지난 83년 전남대에 부임해 지금까지 해금과 거문고의 제자
양성과 연주에 주력하고 있다. 신선생의 뒤를 이어 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보유자후보로 지정되기도했다.
그는 국악예고2학년 재학시절인 65년 서울시립관현악단단원으로 뽑힐 만큼
일찍부터 연주실력을 인정받아왔다. 68년 리틀앤젤스와 함께 미국순회공연을
한 것을 필두로 지금까지 세계 45개국을 돌며 한국의 소리를 알려왔다.
무용곡 "그날이 오면" 연극 "심청전"등의 배경음악 20여곡을 비롯 "비"
"조명곡"등 1백여편의 신곡을 작곡했고 "현금곡전집" "가야금병창곡집"등
악보와 "고흥장수마을민속조사" "남도의창" "줄풍류거문고 가락의 비교관찰"
"한국근현대사의 음악가열전"등 저서를 내며 연주와 교육뿐 아니라 학술적
성과를 쌓아가는데도 노력해온 사람이다. 그는 지난해2월 사재를 털어 서울
마포구 서교동 청기와예식장 근처에 "우리소리"라는 국악상설공연무대를
마련해 국악의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굿판과 농악이 벌어지면 그렇게 신이 날수가
없었습니다. 종일을 따라다니며 구경했지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김씨는 어릴 때 서울 마포구 합정동으로 이사와
살았다. 그는 61년 당시 중학과정이던 서울국악예술학교(국악예고전신) 1기
로 입학하며 국악과 정식으로 인연을 맺었다. 당시 같이 입학한 학생은
모두 30여명 정도였는데 지금껏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최태현(중앙대교수)
이영옥(서울예술단)씨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는 2학년 때부터 지선생에게 해금을 배웠다.
활쓰는 법부터 시작해 "대풍류" "줄풍류" "민요" "산조"등을 차례로
연습했다.
"신쾌동선생께 거문고도 같이 배웠죠. 학교 수업 2시간 외에도 매일
지,신선생댁을 찾아다니며 하루 8시간씩 연습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두선생을 비롯 당시의 국악예술학교선생들은 한이 많은 인물들이었다.
일제의 억압을 받았고 국악을 천시하는 풍토에 짓눌렸다.
"서라벌예대와 경희대음대에 진학해 서양음악작곡을 공부한 것도 선생들의
뜻을 받들자는 생각이었지요."
석사학위 논문은 "산조악 계면조 연구"였습니다" 김씨가 잇고 있는
지영희류해금산조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자진모리로 구성돼있다.
전체적으로 평조와 경기도풍의 선율이 자주 나오며 남도계면조와 조화를
이뤄 지루함이 없고 아기자기한 재미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 산조다.
해금산조는 지영희선생이 처음 만들었고 김씨도 이제 김영재류해금산조를
만들어 연주하고 있다.
"해금은 바이올린과 달리 롱현주법을 사용합니다. 파선,즉 소리의 흔들림
이 중요하지요. 음조와 가락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지만 해금의 농현은 각
지역의 정서마저 그대로 감싸안을 수 있는 소리조절이 가능하다는데 그 매력
이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SBSTV의 연속극 "분례기" "관촌수필"등의 방송음악을 맡아
일했다. 더 이상 한국적 정서가 와해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연습 도중 TV만 켜져있어도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김씨는 무엇보다 우리
정서전반이 서구화돼 우리 소리가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올해는 방송음악활동을 더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영화음악에도
손을 댈 생각이다.
"국악의해에 거는 기대는 많지요. 좋은 국악을 일반에게 알려주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국악교육이지요. 국민학교부터
국악교육을 제대로 해야합니다. 저변확대가 우선 이루어져야하지요" 그는
또 국악공연이 자꾸만 대극장위주로 옮겨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노인들과 주부 어린이들이 동네의 국악공연장에 자주 드나들 수 있을 때
국악의해가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강조한다.
"설날 단오 추석 등 명절에는 TV3사가 "국악시간대"를 동시 편성했으면
합니다. 최소한 국악의해인 올해 만이라도요" TV의 영향력을 실감한
김씨가 하는 말이다. 명지실업전문대 도서관에 근무하는 부인 최광희씨
(46)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권녕설기자>
괴롭고 슬픈 때면 해금이 대신 울어주었고 기쁘고 즐거울 때면 해금이
신이나 노래했지요" 김영재씨(47.전남대국악과교수)는 나쁜 길로 빠지기
딱좋았던 사춘기시절 자신을 붙들어매준 해금소리와 그 가락과 함께 30년을
살고 있는 예인이다. 지영희(1909~79) 신쾌동(1910~78)선생에게 해금과
가야금을 사사해 두 사람이 사라진 80년대 이후 비교적 젊은 나이에 명인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서라벌예대 경희대음대대학원을 거치며 서양음학도
전공했던 그는 지난 83년 전남대에 부임해 지금까지 해금과 거문고의 제자
양성과 연주에 주력하고 있다. 신선생의 뒤를 이어 8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보유자후보로 지정되기도했다.
그는 국악예고2학년 재학시절인 65년 서울시립관현악단단원으로 뽑힐 만큼
일찍부터 연주실력을 인정받아왔다. 68년 리틀앤젤스와 함께 미국순회공연을
한 것을 필두로 지금까지 세계 45개국을 돌며 한국의 소리를 알려왔다.
무용곡 "그날이 오면" 연극 "심청전"등의 배경음악 20여곡을 비롯 "비"
"조명곡"등 1백여편의 신곡을 작곡했고 "현금곡전집" "가야금병창곡집"등
악보와 "고흥장수마을민속조사" "남도의창" "줄풍류거문고 가락의 비교관찰"
"한국근현대사의 음악가열전"등 저서를 내며 연주와 교육뿐 아니라 학술적
성과를 쌓아가는데도 노력해온 사람이다. 그는 지난해2월 사재를 털어 서울
마포구 서교동 청기와예식장 근처에 "우리소리"라는 국악상설공연무대를
마련해 국악의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동네에서 굿판과 농악이 벌어지면 그렇게 신이 날수가
없었습니다. 종일을 따라다니며 구경했지요"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난 김씨는 어릴 때 서울 마포구 합정동으로 이사와
살았다. 그는 61년 당시 중학과정이던 서울국악예술학교(국악예고전신) 1기
로 입학하며 국악과 정식으로 인연을 맺었다. 당시 같이 입학한 학생은
모두 30여명 정도였는데 지금껏 활동하고 있는 사람은 최태현(중앙대교수)
이영옥(서울예술단)씨등 손에 꼽을 정도다.
그는 2학년 때부터 지선생에게 해금을 배웠다.
활쓰는 법부터 시작해 "대풍류" "줄풍류" "민요" "산조"등을 차례로
연습했다.
"신쾌동선생께 거문고도 같이 배웠죠. 학교 수업 2시간 외에도 매일
지,신선생댁을 찾아다니며 하루 8시간씩 연습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두선생을 비롯 당시의 국악예술학교선생들은 한이 많은 인물들이었다.
일제의 억압을 받았고 국악을 천시하는 풍토에 짓눌렸다.
"서라벌예대와 경희대음대에 진학해 서양음악작곡을 공부한 것도 선생들의
뜻을 받들자는 생각이었지요."
석사학위 논문은 "산조악 계면조 연구"였습니다" 김씨가 잇고 있는
지영희류해금산조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굿거리 자진모리로 구성돼있다.
전체적으로 평조와 경기도풍의 선율이 자주 나오며 남도계면조와 조화를
이뤄 지루함이 없고 아기자기한 재미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는 산조다.
해금산조는 지영희선생이 처음 만들었고 김씨도 이제 김영재류해금산조를
만들어 연주하고 있다.
"해금은 바이올린과 달리 롱현주법을 사용합니다. 파선,즉 소리의 흔들림
이 중요하지요. 음조와 가락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지만 해금의 농현은 각
지역의 정서마저 그대로 감싸안을 수 있는 소리조절이 가능하다는데 그 매력
이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SBSTV의 연속극 "분례기" "관촌수필"등의 방송음악을 맡아
일했다. 더 이상 한국적 정서가 와해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였다.
연습 도중 TV만 켜져있어도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김씨는 무엇보다 우리
정서전반이 서구화돼 우리 소리가 제대로 어울릴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올해는 방송음악활동을 더하고 여건이 허락하면 영화음악에도
손을 댈 생각이다.
"국악의해에 거는 기대는 많지요. 좋은 국악을 일반에게 알려주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국악교육이지요. 국민학교부터
국악교육을 제대로 해야합니다. 저변확대가 우선 이루어져야하지요" 그는
또 국악공연이 자꾸만 대극장위주로 옮겨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노인들과 주부 어린이들이 동네의 국악공연장에 자주 드나들 수 있을 때
국악의해가 의미를 지닐 것이라고 강조한다.
"설날 단오 추석 등 명절에는 TV3사가 "국악시간대"를 동시 편성했으면
합니다. 최소한 국악의해인 올해 만이라도요" TV의 영향력을 실감한
김씨가 하는 말이다. 명지실업전문대 도서관에 근무하는 부인 최광희씨
(46)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권녕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