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기댄채 이틀밤을 새우고 먼동이 트기 시작한 3월10일 아침 6시께.
나를 처음부터 맡아서 취조하던 수사관이 다가오더니 "박부장은 밖에 차가
대기중이니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이사 2명과 직원 셋이 남아있는데 왜 나만 내보내는지 알수없어 여전히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지만 일단 귀가했다. 그날은 일요일이라 오전
중에 눈을 붙이고 나서 신문을 보니 당시 야당인 신민당이 이 사건과 관련,
국회소집을 요구하고 국정운용을 비판하는등 온통 야단들이었다.

휴일이라 은행에 나가볼 생각도 안나 그날은 그냥 집에서 쉬고 다음날
출근해 우선 총재실로가 총재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서총재는 나를 보더니 책상 서랍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나의 사표를 돌려
주며 "성준경군과 주은식군(한은이사역임)은 구제가 어렵게 될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주은식씨가 어째서 이 사건과 관련이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은식씨는 서봉균 장관 비서관으로 한국은행에 파견근무중이었다. 그날도
서장관을 수행해 상황실에서 있을 브리핑에 다른 재무부간부들과 같이
참석한것 뿐이었다.

며칠이 지난후 나를 친절하게 대해주던 중앙정보부 수사관 세명과 연락이
닿아 저녁을 대접했다. 그들은 술을 한잔한후 기분이 좋아지자 자랑삼아
이사건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중앙정보부내에서도 한국은행의 대정부건의안은 애국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는 하나 주요 정책 건의안이 누설되었다는 보안적 차원에서 수사를
했다는 얘기였다.

원고와 OHP필름 두가지중 어느 것이 누설되었느냐는 점은 동베를린 간첩
공작사건을 파헤친 민완수사관이 3일만에 OHP필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박기자가 신문사에서 출고한 기사원본을 대조한 결과 숫자 하나
까지 필름과는 같지만 원고와는 다르다는 것을 밝혀냈다고 한다.

그러나 OHP필름의 보관자인 성준경씨가 박기자에게 자료를 주었다는 증거
는 찾지못했다는 것이었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홍이사와 이이사가 동아일보 경제부팀을 저녁 초대,
기사화를 막으려 했던 것이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인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신문사 방침으로 중대기사는 반드시 그 기사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건의안이
한국은행방침변경으로 그날 서장관에게 보고되지 않았다면 이 자료는 일반
연구논문에 지나지 않고 따라서 그 자료는 기사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듣고보니 그럴 것 같았다.

조사를 해보니 장관브리핑을 내가 부인했고 두 이사도 동아일보간부들에게
박기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는 조사역들의 연구논문이며 장관 브리핑을 통해
건의한 사실이 없으므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보도된것은 나와 두 이사의 말과는 달리 환율조정을 장관에게
브리핑한 것이 주비서관에 의해 확인됐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그날 주비서관은 서장관퇴청을 기다리느라 저녁자리에 늦게 도착했다.

동아일보기자들이 "후내삼배"라며 주비서관에게 술을 잔뜩 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래도 부르고 흥이 한창올라 즐거운 연회 분위기에 들어
갔을 무렵,그당시 기자 한사람이 주비서관옆에 앉으며 "오늘 한국은행이
환율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한건 잘할것 아닙니까. 수출기업들이
출혈수출한다고 야단인데"하니까 주비서관이

"그럼요,한국은행 주장이 옳아요"
했다는 것이다.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의 흥이 절정에 달하게된 그순간 그
기사가 사실임이 이 짧은 대화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설도 있었으나 성준경씨와 주은식씨의 사표는
수리됐고 나는 견책을 받았다. 내가 저지른 일에 이 두사람이 희생양이
된것 같아 미안한감을 아직도 잊지않고 있다. 두사람은 그후 복직돼
주은식씨는 한은 이사를 역임했고 성준경씨는 한미은행전무를 지냄으로써
나의 죄책감을 어느정도 씻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