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반의 천신만고 끝에 63년6월이 되자 한국최초의 1960년도
투입산출(IO)표가 마무리단계에 들어섰다. 그간 어려웠던 이 작업은
일본의 IO표가 62년말 완성되어 참고로 할수 있었다는 점이 큰 도움이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론에만 치우친 1959년판 체너리와 클라크의 "Lmterin-
dusttial Relatuonship"이란 책하나에 매달려 생소한 IO표를 만들고
있었기때문에 조사부안에서도 "무모한일을 하고있다. 제대로 해낼수
있을까"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당시 조사부내 평처럼 혁명정부의 무모한 지시로 전세계에서 일본다음
으로 한국이 IO표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AID은 한국의
경제학 수준이 높다고 평가해 당시의 AID한국과정이던 브라운 박사와
그후 하버드대교수였던 데이비드 콜박사,그리고 존즌박사 같은 경제
학자들을 한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평소 나의 경제학 수준을 높여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차에 기회가
왔다. 63년 홍완모씨(한은이사역임)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국은행은
또 1명의 장학생을 뽑고 있었다.
IO표도 마무리단계에 들어가 있었기때문에 미국유학장학생으로 지원을
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 하게도 내밑에서 나를 보좌하던 박경순조사역이
서울대경제학과 출신이라는 조사부상충에서 그를 지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낙담과 고민끝에 총재실로 찾아가 민병도총재에게 "저를 미국에서 공부할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민총재는 즉석에서 "IO표를 만든
박과장을 보내지 누구를 보낸단 말이냐. 자네가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오게"라고 했다.

이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더이상 그자리에 있을수 없었다.
"감사합니다"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곧장 화장실로 가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다방으로 직행해서 한구석에 앉아 연방 담배를 피웠다.
내 나이가 39세라 평소소원이던미국유학의 거의 마지막 기회를 하마터면
놓칠뻔 했기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성환인사담당이사(한은총재역임)가 나를 불렀다.
"박과장을 미국에 보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제 한국은행 힘으로는
정부허가를 받을수 없네 그러니 박과장이 노력해서 되도록 해 보게" 어안이
벙벙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며칠간의 고민끝에 최고회의 재정분과위 전문위워 이훈섭대령(철도청장,
석공사장역임)을 찾아갔다. 이전문위원은 IO표를 만들라고 지시공문을
보냈고 그후 예산과 사람문제,유솜과의 교섭등에서 모든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시던 분이었다. 이대령은 즉석에서 총무처 인사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꼭 해결해주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인사국장실로 찾아갔더니 "지금
우리날 외화보유액이 34만달러밖에 없어 공무원의 연수나 여행도 모두
억제하고 있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한번
실의에 찬 고민끝에 아내와 같이 인사국장댁으로 찾아갔다.

인사국장은 예고없는 방문에 놀라워하면서도 반가히 맞아주어 뛰는가슴을
달래면서 내가 한일들이 한국은행의 일이라기 보다 5개년계획등 국가적으로
필요한일들이 였다고 역설하고 평생소원인 미국 유학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육군대령인 인사국장은 다듣고 난후 내손을 잡으면서 이대령한테서 듣고
박과장만은 꼭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부의 외화사정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며 하지만 자기가 꼭 허가되도록 할테니 너무 염려말고 미국에 가서
많이 배우고와 국가를 위해 일해달라고 말했다.

이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속담을 돼새기면서 아내와 손을 꼭잡고
어두운 밤길을 한없이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