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한은에서 작성한 5개년계획안은 수정보완했다. 이
수정작업에서도 내가 기초한 콜린클라크식의 산업분류에 따른 ''매크로모델''
이나''마이크로 공장건설계획모델''등은 그대로 채택돼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최고회의에서는 경제성장률을 5.5%에서 7.1%로 높이고 공장건설계획을 보
다 늘려 구체적으로 작성했다. 특히 수출은 내가 제시한 8천만달러를 1억2
천만달러로 목표를 대폭 상향조정했다.

1억2천만달러로 수출목표를 높여 잡을때 당시 한은에서 파견근무중이던 상
공부 이면석상역국장은 60년도 4천만달러의 수출실적을 5년내에 3배인 1억2
천만달러로 끌어올리는 것은 어렵다고 했다가 그자리에서 곤욕을 치렀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때 최고회의에서 계획을 수정보완하는 과정에 상공부가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최근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오원철 전청와대경제수석의 ''산
업전략군단사''에서 밝혀진 바 있다.

오원철씨는 "최고회의에서 공장건설5개년계획을 빨리 만들어 오라고 했다.
그래서 산업은행 조사월보에서 수입금액이 비교적 많은 것을 추려서 이런
공장을 세워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우서 비스코스인견사공장 제3.4비료공장 제3.4시멘트공장건설계획을 담은
5개년계획을 김동하 해병소장과 유원식대령, 그리고 주원씨(건설부장관역
임)앞에서 브리핑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당시 이런 마이크로공장건설계획은 공산국가에서나 하고 있었고 그것을
시행하고 있는 공산국가는 대부분 실패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진국
경제학자들은 반대하고 있던 이 마이크로 공장건설계획을 자본주의 국가중
에서는 전무후무하게 우리의 경제개발계획모델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것이
최고회의에서 채택되고 제1차5개년계획에 끝까지 반영되었으며 그 공장건설
이 박정희대통령에 의해 강력히 추진됨에 따라 우리나라 경제가 빈곤의 악
순환에서 탈출하고 오늘날과 같은 중진공업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국가재건최고회는 61년7월22일자로 수정보완한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발표했다. 동시에 이 계획에 공장건설계획뿐만 아니라 종업발전 사회간접
자본조성 등을 총괄적으로 포함시켜 추진하기위해 같은날 경제기획원을 신
설했다.

나는 5개년계획작업을 맡은 경제기획원 우윤희기획과장(경제과학심의회의
사무국장역임)과 경제계획에 관한 상의때문에 자주 만나 친분을 쌓고 있었
다.

9월하순이라고 기억하는 어느날 나는 경제기획원으로부터 급히 와달라는
전갈을 받고 경제기획원회의실로 갔다. 차견권 임원택 변형윤교수등 10여
명의 대학교수들이 모여있었다. 소위 5개년계획의 기본교안을 발표하기 위
한 공청회자리였고 기획원이 교수들에게 브리핑중이었던 것이다.

나를 부른 이유는 매크로계획수지가 과거의 추세와는 달리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졌다는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수치를 내가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있던 우윤희씨가 다급해지자 내가 직
접 답하도록 불렀던 것이다.

나는 콜린크라크의 법칙에 따라 우리나라도 공업화라는 정책목표를 위해
제조업의 비중을 높이고 농업의 비중을 낮추었다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농
업의 비중을 34.9%에서 33.5%로 낮춘 근거가 무엇이며 제3차산업이 콜린클
라크법칙과 달리 오히려 비중이 떨어진 이유가 무엇이냐고 다그쳤다. 나는
공업화를 위해 제조업의 비중을 13%에서 18%로 의욕적으로 높이다보니 농업
비중만 갑자기 많이 떨어뜨릴수 없어 제3차산업 비중을 상대적으로 낮출수
밖에 없는 계획이 되었다고 변명했다.

그랬더니 주먹구구식 꿰어맞추기계획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한하나 숫자
를 따져 보아도 별다른 방법이 없자 공업화 의욕을 담은 계획이라는 뜻에서
교수들도 수긍하는 눈치였다. 다소 불만들은 있었지만 계획안을 찬성하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그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