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글세방으로 이사한뒤 어엿한 사장부인이던 집사람을 파출부로
나서게하고 대학을 보내야할 아들딸들을 취업전선으로 몰아낸 것이
피눈물나는 한이 됩니다" 박흥식만능기계사장(47)은 부도를 당한뒤의
설움에 대해 먼저 이렇게 얘기를 끄집어낸다. 채권자및 금융기관등으로부터
당한 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차마 말을 다할 수 없다며 금새 눈물을
글썽인다.

그가 남달리 자신의 부도에 대해 울분을 느끼고 있는 것은 회사내부의
자금난보다 은행이 금융약관을 잘못 적용해 부도를 당해서라는 것.

다연료사용보일러제조업체의 사장인 그가 부도를 낸 것은 지난 91년
2월27일.

상주공성농공단지에 새로 짓는 공장에 프레스 절곡기등 기계를 구입하면서
발행한 어음을 제때 막지 못해서였다. 한 시중은행상주지점으로부터
2천3백만원을 입금치 못해 부도낙인이 찍히고 말았다. 2천3백만원은 당시
그가 메워내지 못할 만큼 큰돈이 아니었다고.

무엇보다 억울한 것은 부도를 맞을 당시 그곳 상주지점에 자기부인명의로
2천5백20만원의 예금을 해놓은데다 자기명의의 적립식목적신탁통장에
8백90만원이 분명히 들어있었는데도 이를 의도적으로 이체해주지 않아
엉겁결에 부도를 당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박사장이 개인돈
1천3백만원을 더 부쳐주었는데도 끝내 당좌거래정지로 내몰아버렸다는
것이다.

부도를 당하자 그동안 조용히 있던 채권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돈을 끌어다 저쪽을 메우고 저돈을 끌어다 이쪽에 붓는 일로 매일을
보냈다. 특히 상주지점의 편법적인 부도처리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끊임없이 항의했으나 반년이 지나도록 해결해 주지않았다.

엔지니어출신인 그는 처음에는 만능기계가 발행한 어음만 모두 회수하면
부도를 풀어주겠다는 은행측얘기를 순진하게 믿었다고한다.

그러나 상주공장에 대한 준공허가를 받고서도 부도로 인해 적색거래업체로
분류돼 후취담보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끝내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결국 박사장은 혼자서 은행과 맞대결을 벌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나
73년부터 형제설비공업사란 상호로 오직 보일러및 배관설비사업에만 거의
20년간 전념해온 그가 혼자서 금융기관과 대결하기란 역부족이었다.

특허를 3개나 갖고 있고 88년 중진공으로 부터 기술집약형 창업승인을
받아 만능기계를 설립하는등 기술분야에서 만큼은 자신이 있었으나
금융분쟁은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몰랐다.

박사장이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은행감독원. 이곳 민원담당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럴리가 없다"며 조사를 해보겠다고 했으나
고의성부도라는 해답을 얻어내지 못했다. 다음으로 그는 아는
금융기관사람을 모두 찾아다녔으나 큰 도움을 얻지 못했다. 이번에는
광화문에 있는 정부합동민원실을 찾았다. 역시 뚜렷한 응답을 얻지못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금융업무를 공부해 대항하기로 했다. 관련책자와
규정등을 구해 읽고 분석해나갔다. 이같은 공부를 통해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부도가 확실히 부당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실을
토대로 그는 엄청난 분량의 탄원서를 만들어 청와대로 보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경북도로 이첩되는 바람에 금융관련해석을 얻어낼 수 없었다.
행정기관을 통해서는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고 느낀 그가 찾아간 곳은
경실련. 경실련은 은행감독원과 은행에 대해 철저한 조사를 거친뒤
"은행감독원은 은행측의 주장만 반영해왔다"는 의견서를 제시했다.

박사장은 이런 과정을 거쳐오는 동안 커미션및 꺾기등 금융관행을 따르지
않았다가 심한 피해를당한 중소기업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앞으로
이들을 위해 헌신적인 도움을 주기로 마음먹고 있다.

요즘 박사장은 설비공사장기술자로 나가 일을 하고 부인도 계속 파출부로
나가는 덕분에 생활은 꽤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한시바삐
적색거래자라는 누명을 벗고 상주공장에서 자신이 개발한 특허품인
SOS보일러(브랜드명)를 생산해내는 것이 너무나 애절한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