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들이 54만여평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등 "투기1번지"로 드러
난 경기도 용인지역은 예로부터 황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금계
포란)듯한 아늑한 명당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와 관련,1392년 개성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 고려말 충신 포
은 정몽주의 장례행렬이 본관인 영일로 가면서 용인을 지날무렵
갑자기 만장이 움직이지 않아 용인땅에 묘를 썼다는 전설이내려오
고 있다.
또 충북 진천으로 개가한 용인댁이 죽자 본 남편사이에 얻은 아
들들과 새 남편 사이에 얻은 아들들이 서로 제사를 모시겠다고 우
겨 진천현감이 중재안으로 제시했다는 "생거진천 사거용인(살아서
는 진천 죽어서는 용인)"이라는 말도 용인지역이명당임을 나타내는
말로 곧잘 인용된다.
그러나 용인은 서울과 가까운 탓에 빈객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으
로 인구변동이 잦았다는 옛문헌들이 남아있어 오늘날의 투기열풍
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특히 조선후기 고종36
년(1899년)에 발간된 "용인군지도읍지"를 보면 총가구수 4천7백90
호 인구 1만9천25명인데 반해 같은해 12월에 발간된 "용인군지"에
는 총가구수 4천8백79호 인구 1만9천37명으로 7개월동안 89가구가
늘어났음에도 인구는 불과 12명밖에늘지 않아 옛날에도 "외지주인"
들이 많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번에 드러난 용인지역에 대한 투기붐은 70년대초 이곳을 지
나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한것으로
분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