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일 확정발표한 내년 세제개편안은 세제 그 자체로서의
변화보다는금융실명제 정착을 위한 세제보완책 성격이 강하다.

지난 5월 신경제5개년계획에 따른 세제개혁 방향을 발표했고 8월초엔
이를 바탕으로한 정책협의회 의견까지 제시됐으나 금융실명제라는 돌발
변수를 만나 모양이 판이하게 달라진 때문이다. 금융실명제로 인한
갖가지 부작용과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느닷없이 예정에 없던 각종 세율
인하가 첨부되는 대신 당초 계획했던 기업과 근로자에 대한 세금감면
축소방침은 상당폭 후퇴하는 의외의 결과를 내놓았다는 점이다. 선진국
에서는 금융실명거래제도가 공평과세를위한 수단의 하나로 활용되고
있으나 우리의 경우 금융실명제가 목적이고 세제가 실명제를 뒷받침하는
대조적인 양상을 빚어낸 셈이다.

선후가 뒤바뀌긴 했지만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실시되는 바람에
세제측면에서 당초 계획보다 앞당겨 몇가지 진전을 이룩한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가 세율인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의 세율체계가 지나치게 고율다감면이라는
지적이 제기돼 왔고 중장기 세제개혁을 세울때마다 단계적으로 세율을
낮추어 가겠다는 방침을 밝혀왔다. 하지만 세원포착률이 워낙 취약한데다
재정수요 폭증으로 구두선에 그쳐온게 사실이다.

지난번 5개년 세제개혁계획에서도 95년부터 점진적으로 세율인하를
추진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지만 "당시의 재정수급 상황을 감안해서"
라는 단서를 붙여 실현가능성은 불분명했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세제가 깎아주기 보다는 더 걷는 방향으로 진행돼 온게 사실이어서
세율인하는 캐치프레이즈성 구호쯤으로 여기는게 당연시된 면도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번 개편안에서는 소득세와 법인세 상속및 증여세율을 망라한
상당히 포괄적인 세율인하가 실현됐다. 지난 90년 방위세 폐지를 포함한
큰폭의개편이 있은 이후 3년만의 변혁이기도 하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소득과 자산거래의 규모를 감추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현행 세율을 그대로
적용하면 세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그결과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킬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불과 열흘전 까지만 해도 세율인하 요구가
묵살돼오다가 지난주 초부터 인하가능성 쪽으로 급선회한데서도 실명제의
여파임을 실감케한다.

동기야 어찌됐건 과도하게 높은 명목세율이 다소나마 낮아져 세제의
외모가 선진화되는 모습을 보이게 됐고 결과적으로 세부담이 급증하지
않으리라는 안도감도 심어줄수 있게 됐다. 배우자에 대한 상속및 증여와
관련된 공제규모를 확대한 것이라든지, 중소기업의 접대비 한도를 늘린
대목도 세부담경감이라는 의미와는 별개로 "현실화"라는 측면에서 바람
직한 변화로 받아들이는 견해가 많다.

이번 세제개편안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전은 금융실명제와는
관계없이 새정부들어 진행된 개혁작업의 편린들이 여러 곳에 반영돼
있다는 점이다. "조세행정 편의주의"라는 악명을 들을 정도로 납세자의
권익을 무시해온 각종 납세제도를 상당폭 개선했으며 우회적인 상속과
증여에 대한 과세를 강화, 조세의 공평성을 높이려한 흔적이 엿보인다는
얘기다.

이중 삼중으로, 그것도 엄청나게 높은율로 물게 돼있는 각종 가산세의
세율을 낮추고 납세불복등의 요건을 완화하거나 불필요한 절차를 축소
토록한게 그 사례다. 세금징수만을 겨냥해 기업회계원칙과는 다른
기준을 강요해온 세무회계규정을 대폭 손질한 것도 같은 맥락의 조치다.

공익법인을 이용한 우회상속이나 세대생략 상속, 명의신탁을 빙자한
증여등에대한 과세요건을 치밀하게 정비한 것도 새정부 들어 가속화된
개혁의 의미를 세제에 반영한 대목으로 해석할수 있다.

그러나 이번 세제개편안이 우리나라 세제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치유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고는 볼수 없다는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가다.
세율인하등은 금융실명제를 의식해 지나치게 졸속으로 급조됐고 조세
감면축소라는 기본원칙과는 달리 근로소득세는 오히려 감면폭을 늘려
생색내기 인상이 역력하다는 지적이다.

세율인하의 경우 중장기적인 재정수요에 대한 면밀한 예측이 선행돼야
하는데 이번엔 1주일도 안돼 세율인하폭을 만들어 내느라 장차 재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분석하지 못했다. 인하한 세율도 가장 높은 최고세율을
골라 몇%포인트씩 깎아내리는 기계적인 작업으로 해치웠다. 이날 열린
당정협의와 세제발전심의회에서는 세율인하폭 자체가 작다는 주문도
제기됐다. 최고세율만 낮추어 고소득자에게 경감혜택이 몰리자 저소득층
에게는 면세점이나 각종 공제를 확대하는식으로 처리했다.

결국 국민개세의 원칙이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 면세점을 높이지 않겠다던
"선서"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바람직한 세제의 모습을 갖추기위한
기초부터 거꾸로 간 꼴이다.
이번 세제개편안에 철학이 결여됐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다. 세제 본연의
논리를 펴지못하고 민심에 떠밀려 "땜질"로 그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또 예상에 없던 세율인하로 세수부족의 우려가 예견되자 소득계층을
구분하지 않는 간접세인 유류세등 손쉬운 세목의 세율을 대폭 올려 오히려
전체적인 세부담은 늘어나는 표리부동한 결과를 빚어내기도 했다. 이런
이유등으로 이미 상당한 논란이 빚어져 앞으로 확정과정에서 진통은 물론
부분적인 수정을 피할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습적인 금융실명제 실시로 세제개편이 정상적인 행로를 가는데
무리가 있을수 밖에 없다는 점을 부인할수는 없다. 하지만 궤도를
일탈한것이사실이라면 하루속히 바로 잡아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똑같은
지적이다. 다시말해 5개년계획으로 제시한 기본골격이 흔들린만큼
이제라도 일관된 원칙과 철학을 정립해 중장기 계획을 재수립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함께 세제가 정상화돼도 재정지출이 문란하면 재정이 제기능을
발휘하지못하는 점을 감안, 세입과 동시에 세출구조의 개혁도 병행해야
한다는게 중론이다. 재고가 필요한 선심성 공약과 불요불급한 지출요소를
과감히 정리, 재정구조의 경직성을 완화해 나가면서 가욋돈처럼 쓰이는
각종 특별회계및 기금의 용도와 존재의미를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만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