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쩌다가 낮에 전화를 걸어서 집에있는 친지나 동창생을
만나는 경우는 정말 반갑다.

"아니 어쩐일이세요?이 시간에 집에 있고? 참 희한한 일이네?"
"저도요,어쩐 일이세요?집이세요?"
"네,그래요. 집에 있어요"
"참 별일이네. 그냥 허탕이겠거니 하고 한번 전화해 본거예요"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 오전 10시이후는 모두 집에 없는것이 상식으로
되어있다.

직장인이나 자기가게를 갖고있는 사람처럼 정기적으로 나가는데가 있는
이는 물론 제외하고,꼭 집에 있어야 할 사람 아니면 방학이거나 오후늦게
일터에 가는 사람들도 대개는 집에있는 시간이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시간
뿐일 경우가 많다.

직장이 있는 사람,즉 보통의 경우 남자들은 밖에있고 여자들이나 노인들은
집에 있어야 한다는 기존의 관념은 이제 깨어지고 말았다.

모두가 밖에 관심이 있고 밖에 나가야 자신을 성장시키는 토양을 만날수가
있고 밖에 나가야 자기존재를 확인할 기회를 갖는것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모두가 바쁠수밖에 없는 것이다.

칠십대 후반이신 나의 시아버님과 초반이신 시어머님께도 어쩌다 전화할
일이 있으면 아침8시 이전이나 밤에 전화를 해야한다.

자칫하면 집은 비어있으니 계실 시간을 명심해야 하고 일요일이나
공휴일이라야 만나뵐수가 있다.

"집에만 계시면 뭘해?건강하실때 부지런히 출입을 하시고 여행도
다니셔야지"하고 합리화하고 마치 집에 안계시는것이 건강한 증거라도
되듯이 스스로 시부모님들의 부재를 변명한다. 노인대학을 운영하시고
불교노인학교엘 나가시는 시부모님의 건강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편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전화해 오는편에서 항상 나의 부재,나를 집에 없는
사람으로 기정사실화해놓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나. 계시네요?항상 안계시니까 용케도 집에 계실때 전화했군요"하고
마치 내가 집에서 전화받는 일이 희한한 일인것처럼 반가워 한다.

기실 나는 매일같이 "나혼자만의 시간,나혼자 집에 꽁꽁 숨어있기"를
계획하고 또 계획하는것을 사람들은 모르는것 같다.

달력에 나만의 약속이나 행사가 죽죽 기록되어있고 어쩌다 빈칸이 보이는
날은 집에 "숨어있는 날"로 정해놓고있다. 뿐만아니라 가능한한 달력속의
약속을 한데모아 하루에 두세가지 일을 처리하고 다음날 종일 집에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시간표를 짠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짜낸 "나만의 날"을 집에서 보내기도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점점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천신만고끝에 시간을 짜내어 집에 있기로 작정해 놓은날,그날은 아무도
내가 내집에 숨어있음을 모르는 것으로 알고있는 내가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려오고 대문의 도어벨이 울리고 진돗개들이 짖어대고
80세되신 노모는 모처럼 집에 있는 나와 대화하기 위해 얼굴을 계속
마주하시기 위해 내방을 찾고,게다가 요즘은 집과 사무실이 함께 붙은
복합건물에 살고있어 남편과도 하루에 두서너번은 만나야 하는
것이다.

정말 모두가 바쁘고 바삐 움직인다.

나도 그런것 같다. 하지만 이처럼 바삐 움직이다보면 문득 걱정되고
우울할때가 있다. 뭔가 알맹이는 영글지도 못하고 껍질만 앙상하게
자라가고 있지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준비로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동분서주하는 것을 본 고대희랍의
디오게네스는 술통을 언덕위로 끌어올려다가 굴려내려보내고 또
끌어올려다가 굴려보내고 또 끌어다가는 굴려내리곤 했다.
"남들이 바빠서 야단인데 나만 가만히 있을수 있나?이렇게라도 해서
바쁘다는것을 보여줘야지"라고 디오게네스는 중얼거리면서 계속 술통을
굴리고 있었다"
혹시 내가 디오게네스와도 같이 바쁜 시류에 휩쓸리고 있지나
않은지,쓸데없는 일에 휘말려서 디오게네스와도 같이 바쁘게만 보이는 것은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