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의 "개이경복"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는 경복궁. 그옆에 있다하여
고보제가 없어질때 경복중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경복고.
요즈음 와서 왜 청와대와 가깝다는 얘기가 나오는가. 몇사람의 경복출신이
요직에 앉았대서인가 아니면 경복을나온 대통령 자제가 힘을 쓴다고
해서인가. 안되는 말이다. 누구는 누구의 국민학교 선배라는 얘기까지
나온것을 보니 이것은 또 무슨 시답잖은 소린가. 이래서는 안된다.
매스컴이 그렇게 떠들어도 안되고 떠든대로 그렇게 되어서도 안된다.
우리나라는 어째서 편을 갈라 싸우거라 편을 먹고 모여야 하는가. 이게
당파싸움의 연장인가,세도정치의 찌꺼긴가.

45년전 경복에 들어갔을때 동창회장이 전통이란 말에 자주 힘을 주었다.
그때까지만해도 화살통으로 밖에 몰랐던 시골뜨기의 기억에도 그 전통은
요즈음 세태가 관심을 갖는 그런 내용을 담고있지 않았다.

지난 시대에 TK가 부작용이 많았다면 PK도 없어야 하고 또다른 무엇도
없어야 한다. 이 작은 땅에 그것도 남과 북이 갈려있는 형편에서 또
경상도와 전라도가 갈리고,여기에 중부권은 또 어떻고 하는 북새통에
고등학교나 대학까지 끼어드는 일은 말아야 한다.

물론 학교가 같으면 친근감이 있다. 분위기를 공유했던 과거가 있다.
인력으로 갈라놓을수 없는 감정의 다리가 있다. 애교심 애향심 애국심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로고스가 아니라 파토스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소중한 자산이며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용기,자존심과
사명감의 샘일 뿐이지 그것을 발판으로 어떤 영화를 좇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부귀가 그런것이라면 차라리 한발짝 물러서 침잠하는 것이 정도가
아니겠는가.
얼마전 동창의 혼사에 봉투만 보냈더니 거기에 다녀온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많이들 왔더란다. 왜 갑자기 경복이 몰렸단 말인가. 이것은 진정
경복의 미덕이 아니다. 왜 또 한마리의 꼴뚜기가 되려고 하는가. 왜 또
한마리의 망둥이가 되고자 하는가.

이제 우리 모두는 의연해야 한다. 어디에 있으나 최선을 다하고 그것이
인정되어 더 중요한 일을 맡으면 또 최선을 다하고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 줄을 잡으려 하지 말고,떼거리나 패거리를 이루지 말고,항상
당당하고 호연하게들 말이다. 그렇게 살다 가는 것이 멋지다는
것을,그렇게 살지 않으면 비열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치열한 삶을 의식하기 전에 조용한 죽음을 상상해보자. 그순간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유장한 자연도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현대 물리학의 엔트로피이론이다. 하물며 사람의 일생에서 죽음이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건축가는 산 사람의 아파트 옆에
죽은 사람의 아파트를 짓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메마르면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무엇이 되고자 보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의 삶은 훨씬 밝고 싱싱하고 정겨워질 것이며 그런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의 애착심과 집념을 비벼넣을 때 모든 국민이 애타게
바라는 우리의 경제력도 훨씬 커갈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