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11) 정수창 전 두산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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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잔은 다른 술잔과는 달리 잔의 굽위에 손잡이로 쓰이는 대가 길게
붙어있게 마련이다. 와인이 들어있는 잔 부분에 손이 닿게되면 체온으로
와인의 온도가 달라져서 술맛이 나빠지기 때문에 생겨난 부분이다.
점잖게 와인을 마시는 모습은 이렇다. 먼저 술잔에 적당한 양의 와인을
따른 다음 잔의 손잡이 부분을 잡고 와인의 색깔을 즐긴다. 백포도주의
경우 투명한 담호박색,적포도주의 경우는 투명하고 진한 루비색이다.
그다음 약간 잔을 요동시킨후 와인의 향기를 마음껏 즐긴다. 이어 맛을
보는데 입술에 닿는 차디찬 와인의 촉감과 와인의 독특한 맛을 입전체로
음미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오각중에 4각,시각 후각 촉각 미각은 다 일역을
담당하였는데 청각만 빠진 셈이다. 이럴수는 없다는 논란이 일어 청각에도
일역을 주는 방법이 연구되었다. 그것은 함께 와인을 즐기는 분들이
글라스를 맞댐으로써 나오는 "쨍"하는 소리와 함께 건배를 하는 것으로
청각을 만족시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와인잔의 손잡이로 쓰이는 대를 잡았을 경우에만 이 쨍하는 소리는
상쾌한 음향이 된다. 만약 와인이 들어 있는 잔 부분을 잡고 글라스를
맞대면 "탁"하는 불쾌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와인을 즐기는 기쁨의
태반을 여기서 잃어버리게 된다.
보통 유리잔으로도 잔을 올바로 잡기만 하면 쨍하는 음악적인 소리는
나오지만 그것이 크리스털 글라스일때와는 비교가 되지않는다. 그래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들은 그들의 크리스털을 갖기를 열망한다.
포도주를 생산할수 있는 나라는 북위 30도에서 50도사이,남위 30도에서
40도에 위치한 나라에 국한되어 전세계에서 36개국에 달한다. 그러나
크리스털 글라스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23개국에 불과하다. 크리스털
글라스와 포도주등 두가지를 다 생산할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유고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브라질 헝가리 체코 일본 미국
멕시코 터키 러시아 한국등 16개국에 국한되어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자기나라 와인을 자기나라 크리스털 글라스로 마신다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못한 와인 생산국들은
크리스털 글라스를 만들어 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맥주사업에 전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자금의 여유만
있었다면 꼭 진출하고 싶었던 분야가 도자기분야였다. 우리는 맥주병과
관련해서 이미 초자분야에도 깊숙이 들어가 있던 터라 크리스털 글라스로의
진출은 그리 낯선 분야가 아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크리스털을
만드는데 절대 필요한 규석의 품질이 대단히 좋다고한다. 그리고 청자
백자의 명품을 창조하던 우리 선조들의 재능도 우리는 이어받고
있을것이다.
김 성군(당시 제일은행장)과 박희범형(서울대상대학장)이 함께 사람하나를
소개하면서 크리스털 글라스 생산을 권고해왔다. 그들이 소개한 사람인즉
일찍이 고아가된 불우했던 한국소년인데 독일 신부가 서독으로 데리고 가서
공부를 하게한 기술자로서 어릴때부터 크리스털 글라스 제조에만 종사한
청년이었다.
그가 차장으로 일하고 있을때 공장장이 급병을 얻어 입원중이었기 때문에
비법에 속하는 원료배분방법을 부득이 외국사람인 이 청년(여찬동)에게
가르쳐 주지 않을수 없게되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를 찾아 뮌헨에서 그리 멀지않은 체코와 국경을 맞대고있는
츠비젤이란 곳으로 갔다. 이 츠비젤이란 도시는 크리스털 글라스공장
밖에는 없다고 할수있을 정도로 도시전체가 수많은 크리스털 공장으로
이루어져있는 도시였고 깊은 삼림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옛날에
주위에있는 삼림의 목재가 크리스털 제조의 연료로 쓰여졌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료가 풍부한 이지역이 크리스털의 명산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10여일간 여기사와 숙식을 함께 하면서 그 지방 크리스털 공장을
견학하였고 우리가 공장을 세울 경우에 한국에서 기술지도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들중의 한사람은 크리스털 글라스의 조각사였고 다른
한명은 제조공정후 제품에 광택이 나게하는 화학처리기사였다. 이 두
기사와 여기사만 있으면 다른 공정의 기술도 해결될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크리스털 생산계획은 공장건설이 시작된지 1년후인 74년
시제품을 내고 기술을 향상시키면서 74년 11월에 처음으로 시판에
들어갔다. 이때에는 공장시설에 외제기계를 사용하게 되면 의무적으로
일정 비율을 수출해야만 했다. 신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한다는 것 자체가
이만 저만 어려운 일이 아닌데다 해외시장에서의 가격경쟁도 만만치않아
크게 고생한 사업이었다.
우리나라 와인을 우리나라 크리스털 글라스에 따라 마실수 있게 되었다는
자긍심과 우리 크리스털의 품질이 이제 국제적으로도 인정되어 연간
5백만달러어치가 수출되고 있다는 것으로 과거의 고생을 달랠수밖에 없다
붙어있게 마련이다. 와인이 들어있는 잔 부분에 손이 닿게되면 체온으로
와인의 온도가 달라져서 술맛이 나빠지기 때문에 생겨난 부분이다.
점잖게 와인을 마시는 모습은 이렇다. 먼저 술잔에 적당한 양의 와인을
따른 다음 잔의 손잡이 부분을 잡고 와인의 색깔을 즐긴다. 백포도주의
경우 투명한 담호박색,적포도주의 경우는 투명하고 진한 루비색이다.
그다음 약간 잔을 요동시킨후 와인의 향기를 마음껏 즐긴다. 이어 맛을
보는데 입술에 닿는 차디찬 와인의 촉감과 와인의 독특한 맛을 입전체로
음미한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오각중에 4각,시각 후각 촉각 미각은 다 일역을
담당하였는데 청각만 빠진 셈이다. 이럴수는 없다는 논란이 일어 청각에도
일역을 주는 방법이 연구되었다. 그것은 함께 와인을 즐기는 분들이
글라스를 맞댐으로써 나오는 "쨍"하는 소리와 함께 건배를 하는 것으로
청각을 만족시키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와인잔의 손잡이로 쓰이는 대를 잡았을 경우에만 이 쨍하는 소리는
상쾌한 음향이 된다. 만약 와인이 들어 있는 잔 부분을 잡고 글라스를
맞대면 "탁"하는 불쾌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와인을 즐기는 기쁨의
태반을 여기서 잃어버리게 된다.
보통 유리잔으로도 잔을 올바로 잡기만 하면 쨍하는 음악적인 소리는
나오지만 그것이 크리스털 글라스일때와는 비교가 되지않는다. 그래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들은 그들의 크리스털을 갖기를 열망한다.
포도주를 생산할수 있는 나라는 북위 30도에서 50도사이,남위 30도에서
40도에 위치한 나라에 국한되어 전세계에서 36개국에 달한다. 그러나
크리스털 글라스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23개국에 불과하다. 크리스털
글라스와 포도주등 두가지를 다 생산할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독일 유고 루마니아 오스트리아 브라질 헝가리 체코 일본 미국
멕시코 터키 러시아 한국등 16개국에 국한되어 있다.
이들 나라에서는 자기나라 와인을 자기나라 크리스털 글라스로 마신다는
것을 대단한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못한 와인 생산국들은
크리스털 글라스를 만들어 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맥주사업에 전력을 기울일 수 밖에 없기는 했지만 우리에게 자금의 여유만
있었다면 꼭 진출하고 싶었던 분야가 도자기분야였다. 우리는 맥주병과
관련해서 이미 초자분야에도 깊숙이 들어가 있던 터라 크리스털 글라스로의
진출은 그리 낯선 분야가 아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는 크리스털을
만드는데 절대 필요한 규석의 품질이 대단히 좋다고한다. 그리고 청자
백자의 명품을 창조하던 우리 선조들의 재능도 우리는 이어받고
있을것이다.
김 성군(당시 제일은행장)과 박희범형(서울대상대학장)이 함께 사람하나를
소개하면서 크리스털 글라스 생산을 권고해왔다. 그들이 소개한 사람인즉
일찍이 고아가된 불우했던 한국소년인데 독일 신부가 서독으로 데리고 가서
공부를 하게한 기술자로서 어릴때부터 크리스털 글라스 제조에만 종사한
청년이었다.
그가 차장으로 일하고 있을때 공장장이 급병을 얻어 입원중이었기 때문에
비법에 속하는 원료배분방법을 부득이 외국사람인 이 청년(여찬동)에게
가르쳐 주지 않을수 없게되었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를 찾아 뮌헨에서 그리 멀지않은 체코와 국경을 맞대고있는
츠비젤이란 곳으로 갔다. 이 츠비젤이란 도시는 크리스털 글라스공장
밖에는 없다고 할수있을 정도로 도시전체가 수많은 크리스털 공장으로
이루어져있는 도시였고 깊은 삼림 한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옛날에
주위에있는 삼림의 목재가 크리스털 제조의 연료로 쓰여졌었다고 한다.
그래서 연료가 풍부한 이지역이 크리스털의 명산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10여일간 여기사와 숙식을 함께 하면서 그 지방 크리스털 공장을
견학하였고 우리가 공장을 세울 경우에 한국에서 기술지도를 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들중의 한사람은 크리스털 글라스의 조각사였고 다른
한명은 제조공정후 제품에 광택이 나게하는 화학처리기사였다. 이 두
기사와 여기사만 있으면 다른 공정의 기술도 해결될수 있다는 결론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크리스털 생산계획은 공장건설이 시작된지 1년후인 74년
시제품을 내고 기술을 향상시키면서 74년 11월에 처음으로 시판에
들어갔다. 이때에는 공장시설에 외제기계를 사용하게 되면 의무적으로
일정 비율을 수출해야만 했다. 신제품을 해외시장에 수출한다는 것 자체가
이만 저만 어려운 일이 아닌데다 해외시장에서의 가격경쟁도 만만치않아
크게 고생한 사업이었다.
우리나라 와인을 우리나라 크리스털 글라스에 따라 마실수 있게 되었다는
자긍심과 우리 크리스털의 품질이 이제 국제적으로도 인정되어 연간
5백만달러어치가 수출되고 있다는 것으로 과거의 고생을 달랠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