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비망록] (9) 정수창 전두산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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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맥주의 양조기술이 향상되고 판매량도 비교적 급격하게 증가됨에 따라
공장시설의 확장과 제조장비의 개보수도 급박한 문제로 항상 대두되었다.
50년대까지 공장건물의 확장은 동양맥주에 소속되어 있던 영선과가 맡고
시설장비의 개보수는 공무과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고 할수없는 형편이어서 우리가 요구하는
시한내에 요구하는 건물을 지어주는 건축업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자연히 우리는 갖고있던 자원을 활용할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60년7월에
영선과를 독립시켜 동산토건주식회사를 창설하였다. 초창기에는 주로
동양맥주의 공장확장공사를 전담하여 우리를 대단히 만족하게 했던
동산토건은 그들의 루적된 경험과 동양맥주의 신용을 발판으로 점차
외부공사 수주를 늘려가더니 이제는 우리나라 유수의 토건업자로
성장하였다.
제조장비의 개보수도 형편은 같아서 공무과의 일부를 독립시켜 67년5월에
주식회사 윤한공업사(현 두산기계 주식회사의 전신)를 신규로 발족시켰다.
맥주제조기계의 제작.수리외에 회사가 소유하고있던 대중형 자동차의
정비사업,그리고 맥주회사가 선전용으로 당시 많이 설치한 네온사인
아크릴등 각종 선전간판물의 제작.수리업무를 사업에 추가함으로써
독립환산이 가능하도록 노력하였다.
두산기계가 이제는 각종 식품 포장기계의 유일한 제조업체일 뿐만아니라
화학 시설물의 제작에서도 독보적 존재이면서 공작기계 로보트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기업으로 성장한것은 자랑할만 하다.
맥주소비가 증대하면서 맥주생산도 대량생산체제로 들어설수 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1분에 1백병씩 담던 포장기가 1분에 3백병짜리로 바뀌었다.
60년대초부에 병을 공급해 주던 대한유리는 우리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독자적으로 병을 개발.제조하였기 때문에
품질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포장기계의 속도가 3배로 늘어나고 보니
무게중심이 맞지 않는 병은 도중에 넘어지게 마련이다. 포장기계 전체가
물이 흐르듯 순조롭게 움직여야 하는데 중간에서 병이 하나 넘어지게 되면
포장기계 전체가 서게된다. 뿐만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병은 넘어져서
깨진다. 병에 담긴 맥주는 유실되고 만다. 불량품 혹은 작업도중의
파손율이 수율을 얼마나 나쁘게 하는지는 모두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차례 대한유리와 상의도
하였고 좋다고 생각되는 대안을 제시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 못하였던것 같았다.
병의 품질개선없이는 설비효율의 반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우리에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들어왔다.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판유리
제조업체) 농어촌개발회사 동양맥주 주식회사등이 합작으로
농수산물가공제품의 포장용으로 쓰일 유리 용기를 제조한다는
사업계획이었다.
그리하여 69년3월에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하고 공장건설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 공장건설에 있어 일본의 가장 유명한
병유리제조업체인 동양글라스와 기술원조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
고급기술자 수명이 공장건설단계부터 동참하도록 하였다.
한국병유리 주식회사는 작업시초부터 좋은 제품을 낼수 있어서 조업을
시작한지 6개월만인 72년 10월에 코카콜라병 40만달러어치를 일본에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공급에 여유가 있을때 마다 중국을 위시한 동남아각국에
병을 수출하고 있다. 튼튼한 양질의 병을 공급받을수 있게되자 맥주는
안정적으로 공급할수 있게 되었다.
50년대의 맥주 애음가들은 잘 알겠지만 그때의 맥주병은 유엔군이
사용하고 버린 맥주병을 세척해 재사용하였으며 병마개 또한 그들이 버린
깡통통을 뒤집어서 아무 인쇄(인쇄술이 없었다)없는 백판의 마개를
쓸수밖에 없었다.
24개의 병이 들어가던 상자는 나무조각으로 만들어 졌고 그 나무상자가
행여 부서지지나 않을까 해서 새끼줄로 두군데를 묶었다. 지저분하기
짝없는 포장이었다.
병은 한국유리로 해결했고 68년에는 병마개의 공급처였던 삼화왕관에
동양맥주가 투자하였을 뿐만아니라 기술자를 외국에 파견하여 최신의
제품을 공급받을수 있게 하였으며 상자는 69년부터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상자를 락희화학에서 공급받음으로써 해결할수 있었다.
여러 자재의 공급업자가 다같이 좋은 자재를 공급해줄 수 있어야 고품질의
제품이 가능하게 된다. 원료부터 시작해서 포장재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신통한 것이 없던때에 좋은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고 이
어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하다 보니 관계회사가 많이 생긴것이 한국의 실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해 주력기업을 선정할때 두산그룹 주력기업에서 동양맥주를
제외하려하였다. "식품공업이 무슨 주력기업이냐"하는 논리다.
기업발전의 역사를 더듬어 본 실세자들이 동양맥주를 두산그룹의
주력업체로 다시 선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공장시설의 확장과 제조장비의 개보수도 급박한 문제로 항상 대두되었다.
50년대까지 공장건물의 확장은 동양맥주에 소속되어 있던 영선과가 맡고
시설장비의 개보수는 공무과에서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다고 할수없는 형편이어서 우리가 요구하는
시한내에 요구하는 건물을 지어주는 건축업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자연히 우리는 갖고있던 자원을 활용할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60년7월에
영선과를 독립시켜 동산토건주식회사를 창설하였다. 초창기에는 주로
동양맥주의 공장확장공사를 전담하여 우리를 대단히 만족하게 했던
동산토건은 그들의 루적된 경험과 동양맥주의 신용을 발판으로 점차
외부공사 수주를 늘려가더니 이제는 우리나라 유수의 토건업자로
성장하였다.
제조장비의 개보수도 형편은 같아서 공무과의 일부를 독립시켜 67년5월에
주식회사 윤한공업사(현 두산기계 주식회사의 전신)를 신규로 발족시켰다.
맥주제조기계의 제작.수리외에 회사가 소유하고있던 대중형 자동차의
정비사업,그리고 맥주회사가 선전용으로 당시 많이 설치한 네온사인
아크릴등 각종 선전간판물의 제작.수리업무를 사업에 추가함으로써
독립환산이 가능하도록 노력하였다.
두산기계가 이제는 각종 식품 포장기계의 유일한 제조업체일 뿐만아니라
화학 시설물의 제작에서도 독보적 존재이면서 공작기계 로보트등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기업으로 성장한것은 자랑할만 하다.
맥주소비가 증대하면서 맥주생산도 대량생산체제로 들어설수 밖에 없었다.
이때까지 1분에 1백병씩 담던 포장기가 1분에 3백병짜리로 바뀌었다.
60년대초부에 병을 공급해 주던 대한유리는 우리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구나 그들은 독자적으로 병을 개발.제조하였기 때문에
품질면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포장기계의 속도가 3배로 늘어나고 보니
무게중심이 맞지 않는 병은 도중에 넘어지게 마련이다. 포장기계 전체가
물이 흐르듯 순조롭게 움직여야 하는데 중간에서 병이 하나 넘어지게 되면
포장기계 전체가 서게된다. 뿐만아니라 대개의 경우 그 병은 넘어져서
깨진다. 병에 담긴 맥주는 유실되고 만다. 불량품 혹은 작업도중의
파손율이 수율을 얼마나 나쁘게 하는지는 모두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이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차례 대한유리와 상의도
하였고 좋다고 생각되는 대안을 제시하였으나 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 못하였던것 같았다.
병의 품질개선없이는 설비효율의 반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우리에게 대단히 기쁜 소식이 들어왔다. 한국유리공업주식회사(판유리
제조업체) 농어촌개발회사 동양맥주 주식회사등이 합작으로
농수산물가공제품의 포장용으로 쓰일 유리 용기를 제조한다는
사업계획이었다.
그리하여 69년3월에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하고 공장건설을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 공장건설에 있어 일본의 가장 유명한
병유리제조업체인 동양글라스와 기술원조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일본인
고급기술자 수명이 공장건설단계부터 동참하도록 하였다.
한국병유리 주식회사는 작업시초부터 좋은 제품을 낼수 있어서 조업을
시작한지 6개월만인 72년 10월에 코카콜라병 40만달러어치를 일본에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공급에 여유가 있을때 마다 중국을 위시한 동남아각국에
병을 수출하고 있다. 튼튼한 양질의 병을 공급받을수 있게되자 맥주는
안정적으로 공급할수 있게 되었다.
50년대의 맥주 애음가들은 잘 알겠지만 그때의 맥주병은 유엔군이
사용하고 버린 맥주병을 세척해 재사용하였으며 병마개 또한 그들이 버린
깡통통을 뒤집어서 아무 인쇄(인쇄술이 없었다)없는 백판의 마개를
쓸수밖에 없었다.
24개의 병이 들어가던 상자는 나무조각으로 만들어 졌고 그 나무상자가
행여 부서지지나 않을까 해서 새끼줄로 두군데를 묶었다. 지저분하기
짝없는 포장이었다.
병은 한국유리로 해결했고 68년에는 병마개의 공급처였던 삼화왕관에
동양맥주가 투자하였을 뿐만아니라 기술자를 외국에 파견하여 최신의
제품을 공급받을수 있게 하였으며 상자는 69년부터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상자를 락희화학에서 공급받음으로써 해결할수 있었다.
여러 자재의 공급업자가 다같이 좋은 자재를 공급해줄 수 있어야 고품질의
제품이 가능하게 된다. 원료부터 시작해서 포장재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신통한 것이 없던때에 좋은 제품을 만든다는 것은 정말 어려웠고 이
어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하다 보니 관계회사가 많이 생긴것이 한국의 실정이
아닌가 생각한다.
지난해 주력기업을 선정할때 두산그룹 주력기업에서 동양맥주를
제외하려하였다. "식품공업이 무슨 주력기업이냐"하는 논리다.
기업발전의 역사를 더듬어 본 실세자들이 동양맥주를 두산그룹의
주력업체로 다시 선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