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처럼 철저히 기독교를 탄압했던 까닭은 그것이 종교에 머물지
않고,정치세력화해서 막부에 위협이 될까 두려워서였다. 다이묘들 가운데
신자가 여러사람 생겨서 그들이 세력을 연합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렵에는 이미 스페인 화란 영국등의 상선도 빈번히 왕래하고
있었는데,교역(교역)경쟁이 빌미가 되어 화란과 영국 쪽에서 먼저 일본땅에
손길을 뻗치고 있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측을 모함하기 위하여 그들이
기독교를 침략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것이라고,막부에다가 고자질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가 침략의 수단이라는 말은 특히 막부를 자극하여 그동안 비교적
활발히 이루어졌던 서양인들과의 무역에까지 제동을 걸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일본땅에 발을 들여놓은 서양 세력을 뿌리뽑을 수는 없었고,또 그들의
새로운 문물을 일부나마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가사키만은
교역항(교역항)으로 열어놓고 있었다. 나가사키에는 오란다
상관(상관)이라는 그들의 무역사무소가 개설되어 있기도 하였다.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은 한마디로 말하면 서양나라들과의 국교(국교)
거절인 셈이었다.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침략적인 정책과는 달리 도쿠가와이에야스는 평화적
대외관계를 추구했기 때문에 이웃 조선국과는 국교를 맺고 있었다. 막부의
쇼군이 갈릴 때마다 국서(국서)를 조선국에 보내어 그 사실을
알렸고,조선국에서는 외교사절인 통신사(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존황양이라는 기치를 내세워 반막부운동이 꿈틀거리기 시작한 계기가
된것은 페리의 내항(내항)이었다. 미국의 해군제독인 메슈 켈브레이즈
페리가 1853년에 네척의 흑선(흑선)을 이끌고 우라가(포하)해안에 나타났던
것이다. 도쿠가와 막부가 있는 에도의 앞바다,즉 지금의
도쿄만(동경만)이었다.

에도는 발칵 뒤집히다시피 하였다. 그것이 무역을 하러 온 상선이
아니라,군함이었기 때문이다.

6월이었다. 에도 앞바다로 진입하는 기함(기함)사스케헤너호의 갑판 위에
서서 망원경으로 육지쪽을 조망하고 있던 페리는 "오-원더풀-"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흡사 늙은 곰의 목소리같았다.

오십구세의 페리제독은 별명이 바로 "올드부르인"(늙은 곰)이었다. 곰이
포효하는 듯한 굵은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었다.

그의 망원경 속에 비친 것은 후지산(부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