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재한담 > 최호중 전부총리겸 통일원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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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중 전부총리겸 통일원장관은 통일부총리보다는 외무장관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90년말까지 2년동안 외무장관으로 헌신하면서
16개국과 수교합의에 서명했다. 역대외무장관중 최다수교기록을 세운
분이다.
1930년 서울 태생인 최전장관은 경동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뒤
고시7회로 1956년에 외무부에 들어갔다. 외무부에서는 국제경제국장
통상국장 경제차관보를 지내면서 경제관련업무를 많이 처리했다.
외교관으로서는 보기드문 경제외교통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어느나라 대사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최 전부총리=저는 외국대사로 세군데에서 봉직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말레이시아 벨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세곳이 모두 왕국입니다.
말레이시아와 벨기에의 경우 두분왕께서 저와 나이까지 같아 특히 가깝게
지냈지요. 세곳 모두 정들었지만 대사로선 첫 임지였고 3년반이나
근무했던 말레이시아시절이 가장 추억꺼리가 많습니다.
-외교관으로 평생을 보내신만큼 우리외교에 얽힌 비화도 많을테지요.
?최 전부총리=84년에 상공부차관으로 1년반가량 봉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36년간 외무부에서만 근무했지요. 여러곳에서 해외주재관으로 지내는동안
경험한 일화들이 많습니다. 숨은 얘기들을 정리해놓은 자료도 갖고
있고요. 이자료를 토대로 회고록이랄까,외교비사를 집필해 볼 생각입니다.
-9월30일은 한소수교 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수교의 주역으로서 감회가
남다르겠고 그만큼 회고록에 기술할 일화도 많겠습니다.
?최 전부총리=90년 한햇동안 한소간에는 수교과정에서 세가지 외교적 큰
사건이 일어났지요.
첫번째는 90년6월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입니다. 이회담에서
한소정상은 양국수교가 바람직하다는데 합의했지요. 이를 토대로 같은해
9월30일 유엔총회때 소련측과 수교에 합의했고 그해12월에는 노대통령의
모스크바공식방문까지 실현된 것입니다. 저는 이 일련의 사건을
개인적으로 한소수교 3장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한소수교와 관련해 우리나라의 대소30억달러 경제협력을 둘러싸고 지금도
말들이 많은데요.
?최 전부총리=대소경협자금 30억달러에 대해선 많은 분들이 궁금하게
생각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이나 유엔에서의 수교합의과정에서는
경협의 구체적 내용이나 규모에 관해 전혀 언급이 없었어요. 그뒤
노대통령이 모스크바를 공식방문했을때 소련측에서 우리가 경협보따리를 풀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았어요. 물론 우리쪽에선 아무런 언질도
주지않았지만. 그당시 우리가 취한 입장은 소련에서 경제사절단을 서울에
보내면 소련사절단과 경협문제를 얘기하겠다는 것이었지요. 노.고르비의
모스크바정상회담이 끝난직후 당시 소련외무장관이던 셰바르드나제가
별도로 만나자는 요청이 있었어요. 셰바르드나제는 "현재 소련의
경제난때문에 고르바초프가 정치적으로 몹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운을
떼더군요. 그러면서 내게 "노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경협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혀주도록 노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없겠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이에대해 "동양적사고방식으로는 국가원수가 금전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 법"이라고 설명했지요. 다만 조속한 시일내에
소련경제사절단을 한국에 보내면 그때가서 사절단과 경협문제를
논의하겠다고 하니까 셰바르드나제도 더이상은 채근하지 않았어요.
모스크바방문당시까지도 경협얘기는 하나도 진전이 없었던 셈이지요.
구체적인 경협규모는 이듬해 소련사절단이 서울을 방문했을때 결론지은
것입니다. 30억달러의 대소경협자금에 대해 요즘들어 수교의 대가로
지불하기에는 너무 과하지 않았느냐는 얘기들도 있습니다. 분명한것은
30억달러가 무상으로 제공된게 아니고 차관이라든가,투자라는 형식으로
공여됐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옛 소련지역국가들이 극심한 경제난에 빠져
원리금상환마저 어려운 형편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러시아등이 장래성이
없는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옛 소련국가들이 서방선진국들의
도움으로 경제기반을 닦게되고 막대한 천연자원의 개발에 힘입어 경제가
본궤도에 오르면 30억달러 경협자금이 옛소련지역에 대한 장기투자로
인식될 날이 올것입니다.
-한소수교에 이은 한중수교로 동북아지역에도 세력판도의 변화가 일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은데요. 한중수교가 예상보다 앞당겨진 것은 일본의
정치대국화를 견제하려는 중국의 외교정책때문이라는 견해도 있고요.
?최부총리=유엔에서 한소가 수교합의를 했을때 중국외교부장도 유엔을
방문중이었지요. 당시 아태지역 외무장관끼리 만찬을 함께했는데
알파벳순으로 자리를 잡다보니 전기침외교부장과 나란히 앉게됐어요. 그날
전부장은 한중관계개선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얘기만을
강조했어요. 그때만해도 우리가 유엔에 가입하지 못했을때지요.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요. 우리는 유엔가입은 물론 소련권과의 수교에 이어
예전의 비동맹권인 아프리카제국과도 수교하고 있습니다. 베트남과도 속속
수교하려는 마당에 중국에서도 대한수교를 서두를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양국관계정상화가 중국의 경제개발에 막대한 도움이 되리라는 측면에서도
우리와 수교를 늦출 이유가 없었겠지요. 한중수교협상과정에서 일본의
정치대국화를 견제해야한다는 얘기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겠지만 중국측은
내심 일본을 의식하고 있을거예요.
-한소 한중수교로 이들국가와의 관계가 날로 긴밀해지는 반면 한일관계는
최근들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들이 있습니다.
?최전부총리=한일관계가 악화된 요인중의 하나는 "과거청산"이라는 문제를
보는 양국의 시각차이가 너무 크다는데 있지요.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속속들이 파헤쳐 잘못된 점을 사과하라고 강조합니다. 일본측은
과거지사에 대해 한두번 사과했으면 그만이지 기회있을때마다 과거문제를
들고나와 이전보다 더 강하게 사과하길 바란다고 불만이에요. 독일의 경우
과거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했던데비해 일본은 대범하지 못한것
같아요. 사견입니다만 일본에 대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해주길 기대하기
보다는 차라리 우리쪽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과거에만 집착하지말고
양국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새롭게 출발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봐요.
-한중수교이후에 북한.미국 북한.일본간에 외교적 접촉이 더욱 활발해지고
접촉수준도 격상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최전부총리=이문제와 관련해서 한때 교차승인이라는 말이 나돌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소련이나 중국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일과 북한이
미국이나 일본과 수교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사안입니다. 우리가
중국하고 수교할테니 북한은 미국과 수교해도 다는식의 교차승인은
우리정부의 입장이 아닙니다. 북한과 미국사이에는 현재 핵문제
인권문제등이 현안으로 걸려있어 북한이 이들문제에서 양보하고 개혁
개방정책을 실시하지 않는한 북한.미국접촉이 조만간 수교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북한관계에 관한한 일본도 미국과 완전히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반도통일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최전부총리=우리정부가 지향하는 통일은 "우리는 같은 민족이므로 반드시
무조건 통일돼야한다"는 식의 통일지상주의적 감상적 통일이 아니예요.
7천만민족이 자자손손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수있는민주.자유.번영이
확보되는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통일을 위해선
북한이 유일 주체사상만으로는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닫게해야겠지요. 과거 북한과 가까웠던 국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남북한간에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북한이 스스로
개혁 개방의 길로 나아가도록 유도해야겠지요. 그래야만 북한이
자연스럽게 우리와 뜻을 같이해서 우리정부가 지향하는 통일을 이룰수 있지
않을까요. 독일의 예에서도 보듯이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서 통일은
이뤘지만 서독이 처음부터 동독을 흡수합병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봐요. 동독이 스스로 체제를 지탱할 수없으니까 "우리를
병합해서라도 도와주시오"해서 통일된 것이지요. 북한이 계속 현재의
폐쇄체제를 고집하는한 동독처럼 될 가능성도 있지요.
동북아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통일에 대한 준비도 더욱 철저히
해야겠지요.
?최전부총리=통일을 위한 "대비"는 대학입시와 같아서 어느단계에서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대비를 착실히 할수록 통일된
시기에 혼란을 극소화하는 것이지요.
냉전체제붕괴이후 국가간 경쟁이 군사력에서 경제력대결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경제블록화추세도 심화되고있고요. 아시아지역에도
경제블록이 탄생할수 있을까요.
?최전부총리=현재 세계각국에서는 지역별로 경제협력을 위한 공동노력이
진행중에 있지요. 아시아공동시장창설에 관한 움직임도 오래전부터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아시아는 국가간에 빈부격차가 크고 문화적 배경도
달라 북미나 유럽처럼 하나의 공동협력체를 형성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지요. 하지만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의 경우처럼 경제발전의
격차가 큰 나라사이에도 서로 협조만 잘 되면 상호보완적인 경제협력관계를
유지할수 있어요. 이점에서 아시아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협력가능성이
높은 지역입니다. 우리나라와 호주의 주도적 역할로 출범한
APEC(아대경제협력)도 바로 아태국가들의 정치 경제적 협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북아경제협력기구의 추진이 지리적 문화적 측면에서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최전부총리=동북아구가들은 지역적으로 가깝고 동양적 사고방식이라든가
생활태도면에서도 서로 엇비슷해서 경제협력체창설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만 한반도분단이 이지역의 경제협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한반도통일 한반도평화정착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현실적으로
동북아경제공동체구상은 실현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대담=김홍기정치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90년말까지 2년동안 외무장관으로 헌신하면서
16개국과 수교합의에 서명했다. 역대외무장관중 최다수교기록을 세운
분이다.
1930년 서울 태생인 최전장관은 경동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뒤
고시7회로 1956년에 외무부에 들어갔다. 외무부에서는 국제경제국장
통상국장 경제차관보를 지내면서 경제관련업무를 많이 처리했다.
외교관으로서는 보기드문 경제외교통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어느나라 대사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최 전부총리=저는 외국대사로 세군데에서 봉직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말레이시아 벨기에 사우디아라비아 세곳이 모두 왕국입니다.
말레이시아와 벨기에의 경우 두분왕께서 저와 나이까지 같아 특히 가깝게
지냈지요. 세곳 모두 정들었지만 대사로선 첫 임지였고 3년반이나
근무했던 말레이시아시절이 가장 추억꺼리가 많습니다.
-외교관으로 평생을 보내신만큼 우리외교에 얽힌 비화도 많을테지요.
?최 전부총리=84년에 상공부차관으로 1년반가량 봉직한 것을 제외하고는
36년간 외무부에서만 근무했지요. 여러곳에서 해외주재관으로 지내는동안
경험한 일화들이 많습니다. 숨은 얘기들을 정리해놓은 자료도 갖고
있고요. 이자료를 토대로 회고록이랄까,외교비사를 집필해 볼 생각입니다.
-9월30일은 한소수교 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수교의 주역으로서 감회가
남다르겠고 그만큼 회고록에 기술할 일화도 많겠습니다.
?최 전부총리=90년 한햇동안 한소간에는 수교과정에서 세가지 외교적 큰
사건이 일어났지요.
첫번째는 90년6월의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입니다. 이회담에서
한소정상은 양국수교가 바람직하다는데 합의했지요. 이를 토대로 같은해
9월30일 유엔총회때 소련측과 수교에 합의했고 그해12월에는 노대통령의
모스크바공식방문까지 실현된 것입니다. 저는 이 일련의 사건을
개인적으로 한소수교 3장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한소수교와 관련해 우리나라의 대소30억달러 경제협력을 둘러싸고 지금도
말들이 많은데요.
?최 전부총리=대소경협자금 30억달러에 대해선 많은 분들이 궁금하게
생각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이나 유엔에서의 수교합의과정에서는
경협의 구체적 내용이나 규모에 관해 전혀 언급이 없었어요. 그뒤
노대통령이 모스크바를 공식방문했을때 소련측에서 우리가 경협보따리를 풀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았어요. 물론 우리쪽에선 아무런 언질도
주지않았지만. 그당시 우리가 취한 입장은 소련에서 경제사절단을 서울에
보내면 소련사절단과 경협문제를 얘기하겠다는 것이었지요. 노.고르비의
모스크바정상회담이 끝난직후 당시 소련외무장관이던 셰바르드나제가
별도로 만나자는 요청이 있었어요. 셰바르드나제는 "현재 소련의
경제난때문에 고르바초프가 정치적으로 몹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운을
떼더군요. 그러면서 내게 "노대통령이 고르바초프에게 경협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혀주도록 노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없겠느냐"는 거예요.
우리는 이에대해 "동양적사고방식으로는 국가원수가 금전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 법"이라고 설명했지요. 다만 조속한 시일내에
소련경제사절단을 한국에 보내면 그때가서 사절단과 경협문제를
논의하겠다고 하니까 셰바르드나제도 더이상은 채근하지 않았어요.
모스크바방문당시까지도 경협얘기는 하나도 진전이 없었던 셈이지요.
구체적인 경협규모는 이듬해 소련사절단이 서울을 방문했을때 결론지은
것입니다. 30억달러의 대소경협자금에 대해 요즘들어 수교의 대가로
지불하기에는 너무 과하지 않았느냐는 얘기들도 있습니다. 분명한것은
30억달러가 무상으로 제공된게 아니고 차관이라든가,투자라는 형식으로
공여됐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옛 소련지역국가들이 극심한 경제난에 빠져
원리금상환마저 어려운 형편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러시아등이 장래성이
없는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옛 소련국가들이 서방선진국들의
도움으로 경제기반을 닦게되고 막대한 천연자원의 개발에 힘입어 경제가
본궤도에 오르면 30억달러 경협자금이 옛소련지역에 대한 장기투자로
인식될 날이 올것입니다.
-한소수교에 이은 한중수교로 동북아지역에도 세력판도의 변화가 일고
있다는 지적들이 많은데요. 한중수교가 예상보다 앞당겨진 것은 일본의
정치대국화를 견제하려는 중국의 외교정책때문이라는 견해도 있고요.
?최부총리=유엔에서 한소가 수교합의를 했을때 중국외교부장도 유엔을
방문중이었지요. 당시 아태지역 외무장관끼리 만찬을 함께했는데
알파벳순으로 자리를 잡다보니 전기침외교부장과 나란히 앉게됐어요. 그날
전부장은 한중관계개선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얘기만을
강조했어요. 그때만해도 우리가 유엔에 가입하지 못했을때지요.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요. 우리는 유엔가입은 물론 소련권과의 수교에 이어
예전의 비동맹권인 아프리카제국과도 수교하고 있습니다. 베트남과도 속속
수교하려는 마당에 중국에서도 대한수교를 서두를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양국관계정상화가 중국의 경제개발에 막대한 도움이 되리라는 측면에서도
우리와 수교를 늦출 이유가 없었겠지요. 한중수교협상과정에서 일본의
정치대국화를 견제해야한다는 얘기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겠지만 중국측은
내심 일본을 의식하고 있을거예요.
-한소 한중수교로 이들국가와의 관계가 날로 긴밀해지는 반면 한일관계는
최근들어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들이 있습니다.
?최전부총리=한일관계가 악화된 요인중의 하나는 "과거청산"이라는 문제를
보는 양국의 시각차이가 너무 크다는데 있지요. 우리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들을 속속들이 파헤쳐 잘못된 점을 사과하라고 강조합니다. 일본측은
과거지사에 대해 한두번 사과했으면 그만이지 기회있을때마다 과거문제를
들고나와 이전보다 더 강하게 사과하길 바란다고 불만이에요. 독일의 경우
과거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과했던데비해 일본은 대범하지 못한것
같아요. 사견입니다만 일본에 대해 과거를 깨끗이 청산해주길 기대하기
보다는 차라리 우리쪽이 대국적인 견지에서 과거에만 집착하지말고
양국이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새롭게 출발하는게 바람직하다고 봐요.
-한중수교이후에 북한.미국 북한.일본간에 외교적 접촉이 더욱 활발해지고
접촉수준도 격상될 것으로 예상됩니다만.
?최전부총리=이문제와 관련해서 한때 교차승인이라는 말이 나돌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소련이나 중국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일과 북한이
미국이나 일본과 수교하는 문제는 전혀 별개의 사안입니다. 우리가
중국하고 수교할테니 북한은 미국과 수교해도 다는식의 교차승인은
우리정부의 입장이 아닙니다. 북한과 미국사이에는 현재 핵문제
인권문제등이 현안으로 걸려있어 북한이 이들문제에서 양보하고 개혁
개방정책을 실시하지 않는한 북한.미국접촉이 조만간 수교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대북한관계에 관한한 일본도 미국과 완전히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반도통일을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충족돼야 한다고 보십니까.
?최전부총리=우리정부가 지향하는 통일은 "우리는 같은 민족이므로 반드시
무조건 통일돼야한다"는 식의 통일지상주의적 감상적 통일이 아니예요.
7천만민족이 자자손손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수있는민주.자유.번영이
확보되는 통일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통일을 위해선
북한이 유일 주체사상만으로는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루빨리 깨닫게해야겠지요. 과거 북한과 가까웠던 국가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남북한간에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북한이 스스로
개혁 개방의 길로 나아가도록 유도해야겠지요. 그래야만 북한이
자연스럽게 우리와 뜻을 같이해서 우리정부가 지향하는 통일을 이룰수 있지
않을까요. 독일의 예에서도 보듯이 서독이 동독을 흡수해서 통일은
이뤘지만 서독이 처음부터 동독을 흡수합병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봐요. 동독이 스스로 체제를 지탱할 수없으니까 "우리를
병합해서라도 도와주시오"해서 통일된 것이지요. 북한이 계속 현재의
폐쇄체제를 고집하는한 동독처럼 될 가능성도 있지요.
동북아정세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통일에 대한 준비도 더욱 철저히
해야겠지요.
?최전부총리=통일을 위한 "대비"는 대학입시와 같아서 어느단계에서
준비가 완전히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대비를 착실히 할수록 통일된
시기에 혼란을 극소화하는 것이지요.
냉전체제붕괴이후 국가간 경쟁이 군사력에서 경제력대결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지역별로 경제블록화추세도 심화되고있고요. 아시아지역에도
경제블록이 탄생할수 있을까요.
?최전부총리=현재 세계각국에서는 지역별로 경제협력을 위한 공동노력이
진행중에 있지요. 아시아공동시장창설에 관한 움직임도 오래전부터
계속됐습니다. 그런데 아시아는 국가간에 빈부격차가 크고 문화적 배경도
달라 북미나 유럽처럼 하나의 공동협력체를 형성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지요. 하지만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의 경우처럼 경제발전의
격차가 큰 나라사이에도 서로 협조만 잘 되면 상호보완적인 경제협력관계를
유지할수 있어요. 이점에서 아시아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협력가능성이
높은 지역입니다. 우리나라와 호주의 주도적 역할로 출범한
APEC(아대경제협력)도 바로 아태국가들의 정치 경제적 협력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북아경제협력기구의 추진이 지리적 문화적 측면에서 실현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최전부총리=동북아구가들은 지역적으로 가깝고 동양적 사고방식이라든가
생활태도면에서도 서로 엇비슷해서 경제협력체창설에 큰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만 한반도분단이 이지역의 경제협력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한반도통일 한반도평화정착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현실적으로
동북아경제공동체구상은 실현되기 어렵다고 봅니다.
<대담=김홍기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