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사설 (15일자) > 우리에게서 식민근성은 청산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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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감격을 외치던 함성이 삼천리강산을 진동하던 8.15광복
46주년,그때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잿더미가 된 패전국
일본은 이제 세계최강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대국
정치대국이되어 아시아를 지배하려 꿈꾸고있다. 전승국처럼 환희의 새날을
맞아 춤추던 한국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피땀으로 이룩한 선두중진국에서
지금 좌절감을 씹고있다. 경쟁력은 떨어지고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이대로 몇년 방치하면 외채망국론에 다시 휩싸일 판이다.
한국제품은 국제시장에서 다른 중진국상품에 쫓기고 일제와는 감히 겨룰수
없게 쳐져있다. 이것이 새로운 위협이며 군사 정치로까지 이어지게되는
새로운 짐이다.
서양문화권밖에서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등장한것이 일본이다. 당돌하게
개최한 88올림픽을 계기로 동양권에서 또다른 선진국으로 부상할 나라가
한국이라고 세계는 주목했었다. 일본은 앞으로 자기나라를 위협할 존재로
한국을 꺼렸었다. 그런데 이제 일본은 안심하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그 분열증을 보고 경쟁상대의 탈락을 내심 고소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도 또한 한국의 세기적 도약가능성을 젖혀버렸고 그대신
거리의 난투극을 한국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누가 이처럼 한국인의 기를
꺾고 세계가 기대했던 한국의 전도를 배반하고 있는 것인가.
못살아도 좋으니 나라만 다시 찾았으면.. 이것이 과거 우리의
소원이었으며 진심이었다. 그전엔 그만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국경이
엄격한 자족의 세계이었으니까 그랬었다. 지금은 이것이 어림없다.
국경이 없는 국제경제시대에서는 못사는 나라 국민은 잘사는 나라의
잡역부일을 해야한다. 제국주의시대처럼 강제가 아니라 기를 쓰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청해서 하게된다. 잘사는 나라의 호텔보이,잘사는 나라
가정의 하녀가 된다든가,심지어 자기나라 딸들이 외국에 가서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있다. 그리고
자기나라시장은 외국의 상품식민지가 된다.
이런 못사는 나라는 독립국이되 진정한 독립국은 못된다. 한국으로서는
못사는 나라가 더욱 용납안된다. 어느덧 우리는 그럭저럭 자족하기엔
욕망이 너무 많은 민족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진국의
사회구조때문인지 모른다. 더구나 세계최강의 경제력을 갖춘 일본의 옆에
사는 한국이기때문에 잘 살아야하고 우리의 광복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기에 강력한 경제력을 갖춰야한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어야만
광복의 의미가 완수되는 것이다.
선진국이란 그들의 성장잠재력을 적어도 최소한의 적정수준까지 개발한
국가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못한 곳이 후진국이므로 자기 할탓에 달려있다.
한국은 성장잠재력의 개발에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등생이었다.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고 한국에 지게되는 이유"(사세휘저)"라는 외국인 책까지
나왔었는데 용이 아닌 지렁이로 주저앉아 광복을 미완의 장으로 만들
것인가.
흔히 말하길 1인당소득 4천달러수준이 선진국과 중진국을 가르는 마의
분수령이라고 한다. 이런 상태에선 소위 소득혁명이라는 사회적 변혁에
휩싸이게되고 거의 모든 나라가 이의 수습에 실패하여 전락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억제되었던 분배욕구가 분출하고 불평등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성장무용론이나 성장회의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무덤이 아니고서는 성장후퇴로 불평등을 해결할 길은 없다.
노벨경제학상수상자 아더 루이스교수는 "개발의 초기에는 경제성장률이
가속화하면 소득분배는 더욱 불평등하게 되며 나중 단계에 와서는 분배가
안정적으로 되고 그 다음에는 보다 덜 불평등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논술했다.
또다른 노벨경제학상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교수도 1.2차대전후 선진국이
될수록 소득불평등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교통
통신의 발달과 전시효과 때문에 열망이 실현보다 더 빨리 확산되고 그
시차를 더 크게 느끼게 만들어 욕구를 수습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불평등을 축소하는 길임에 틀림없고 이를 따르는
사회만이 선진대열에 합류할수 있다.
중진국에 이르기까지는 거역하기 어려운 권위주의가 각계각층의 욕구를
짓눌러 효율적 경제성장을 가능케하였다. 이제 그런 권위주의는 사라졌다.
누가 선진국에의 길을 이끌 것인가. 어느 외국잡지는 이에 대해
경청할만한 충고를 하고있다. 즉 권위라는 타자에 강제되지 않고서도
스스로가 땀을 흘리며 물건을 생산할수 있느냐,그렇지 못하느냐가 결국
선진국이 되느냐 못되느냐의 기로라는 것이다. 박대통령이 밥을 짓고
전대통령이 밥을 먹고 노대통령이 설겆이를 하고있다는 재담이
있는데,다시한번 새로운 밥을 짓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자제심이어야한다는 얘기다.
그렇다. 정부는 설득하고 유도할수는 있지만 최종적으로 성취시키는 것은
일반국민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의 짐은 국민의 어깨에 놓여있고 우리
모두가 그 무게를 느껴야 한다.
한국의 선진화는 광복46년이 그대로 분단46년이 된 가장 가슴아픈 한을
푸는 길이기도 하다. 못사는 통일이 아니라 잘사는 통일이 되어야 광복과
통일의 진정한 완성인 것이다. 통일비용만도 2천억 4천억달러로 추산되고
있고 북녘의 2천만동포를 넉넉하게 하는 과제 또한 벅찬것인데
경제선진화가 없이는 이를 감당할수 없다. 피흘려 독립항쟁을 한 선열들의
멸사보국을 생각하면 우리가 그일을 꼭 해내야 한다.
46주년,그때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났다. 잿더미가 된 패전국
일본은 이제 세계최강의 경제대국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대국
정치대국이되어 아시아를 지배하려 꿈꾸고있다. 전승국처럼 환희의 새날을
맞아 춤추던 한국은 허리띠를 졸라매며 피땀으로 이룩한 선두중진국에서
지금 좌절감을 씹고있다. 경쟁력은 떨어지고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이대로 몇년 방치하면 외채망국론에 다시 휩싸일 판이다.
한국제품은 국제시장에서 다른 중진국상품에 쫓기고 일제와는 감히 겨룰수
없게 쳐져있다. 이것이 새로운 위협이며 군사 정치로까지 이어지게되는
새로운 짐이다.
서양문화권밖에서 유일하게 선진국으로 등장한것이 일본이다. 당돌하게
개최한 88올림픽을 계기로 동양권에서 또다른 선진국으로 부상할 나라가
한국이라고 세계는 주목했었다. 일본은 앞으로 자기나라를 위협할 존재로
한국을 꺼렸었다. 그런데 이제 일본은 안심하고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그 분열증을 보고 경쟁상대의 탈락을 내심 고소해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도 또한 한국의 세기적 도약가능성을 젖혀버렸고 그대신
거리의 난투극을 한국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누가 이처럼 한국인의 기를
꺾고 세계가 기대했던 한국의 전도를 배반하고 있는 것인가.
못살아도 좋으니 나라만 다시 찾았으면.. 이것이 과거 우리의
소원이었으며 진심이었다. 그전엔 그만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국경이
엄격한 자족의 세계이었으니까 그랬었다. 지금은 이것이 어림없다.
국경이 없는 국제경제시대에서는 못사는 나라 국민은 잘사는 나라의
잡역부일을 해야한다. 제국주의시대처럼 강제가 아니라 기를 쓰고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청해서 하게된다. 잘사는 나라의 호텔보이,잘사는 나라
가정의 하녀가 된다든가,심지어 자기나라 딸들이 외국에 가서 몸을 팔아
돈을 버는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있다. 그리고
자기나라시장은 외국의 상품식민지가 된다.
이런 못사는 나라는 독립국이되 진정한 독립국은 못된다. 한국으로서는
못사는 나라가 더욱 용납안된다. 어느덧 우리는 그럭저럭 자족하기엔
욕망이 너무 많은 민족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진국의
사회구조때문인지 모른다. 더구나 세계최강의 경제력을 갖춘 일본의 옆에
사는 한국이기때문에 잘 살아야하고 우리의 광복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이기에 강력한 경제력을 갖춰야한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어야만
광복의 의미가 완수되는 것이다.
선진국이란 그들의 성장잠재력을 적어도 최소한의 적정수준까지 개발한
국가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못한 곳이 후진국이므로 자기 할탓에 달려있다.
한국은 성장잠재력의 개발에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등생이었다.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고 한국에 지게되는 이유"(사세휘저)"라는 외국인 책까지
나왔었는데 용이 아닌 지렁이로 주저앉아 광복을 미완의 장으로 만들
것인가.
흔히 말하길 1인당소득 4천달러수준이 선진국과 중진국을 가르는 마의
분수령이라고 한다. 이런 상태에선 소위 소득혁명이라는 사회적 변혁에
휩싸이게되고 거의 모든 나라가 이의 수습에 실패하여 전락한다는 것이다.
지금껏 억제되었던 분배욕구가 분출하고 불평등감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이래서 성장무용론이나 성장회의론이 등장한다.
그러나 무덤이 아니고서는 성장후퇴로 불평등을 해결할 길은 없다.
노벨경제학상수상자 아더 루이스교수는 "개발의 초기에는 경제성장률이
가속화하면 소득분배는 더욱 불평등하게 되며 나중 단계에 와서는 분배가
안정적으로 되고 그 다음에는 보다 덜 불평등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논술했다.
또다른 노벨경제학상수상자 사이먼 쿠즈네츠교수도 1.2차대전후 선진국이
될수록 소득불평등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교통
통신의 발달과 전시효과 때문에 열망이 실현보다 더 빨리 확산되고 그
시차를 더 크게 느끼게 만들어 욕구를 수습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불평등을 축소하는 길임에 틀림없고 이를 따르는
사회만이 선진대열에 합류할수 있다.
중진국에 이르기까지는 거역하기 어려운 권위주의가 각계각층의 욕구를
짓눌러 효율적 경제성장을 가능케하였다. 이제 그런 권위주의는 사라졌다.
누가 선진국에의 길을 이끌 것인가. 어느 외국잡지는 이에 대해
경청할만한 충고를 하고있다. 즉 권위라는 타자에 강제되지 않고서도
스스로가 땀을 흘리며 물건을 생산할수 있느냐,그렇지 못하느냐가 결국
선진국이 되느냐 못되느냐의 기로라는 것이다. 박대통령이 밥을 짓고
전대통령이 밥을 먹고 노대통령이 설겆이를 하고있다는 재담이
있는데,다시한번 새로운 밥을 짓는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자제심이어야한다는 얘기다.
그렇다. 정부는 설득하고 유도할수는 있지만 최종적으로 성취시키는 것은
일반국민이다. 선진국으로 가는 길의 짐은 국민의 어깨에 놓여있고 우리
모두가 그 무게를 느껴야 한다.
한국의 선진화는 광복46년이 그대로 분단46년이 된 가장 가슴아픈 한을
푸는 길이기도 하다. 못사는 통일이 아니라 잘사는 통일이 되어야 광복과
통일의 진정한 완성인 것이다. 통일비용만도 2천억 4천억달러로 추산되고
있고 북녘의 2천만동포를 넉넉하게 하는 과제 또한 벅찬것인데
경제선진화가 없이는 이를 감당할수 없다. 피흘려 독립항쟁을 한 선열들의
멸사보국을 생각하면 우리가 그일을 꼭 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