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공소사실 순순히 시인...경비삼엄한 가운데 첫공판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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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858기 폭파와 관련, 국가보안법과 항공법, 항공기운항안전법위
반혐의로 불구속기소된 김현희 피고인(28)에 대한 첫 공판이 사건발생 464일,
기소된지 32일만인 7일 상오10시 서울형사지법대법정에서 열렸다.
서울형사지법 합의10부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김피고인의 출생연도와
출생지, 현주소등을 묻는 재판부의 간단한 인정신문을 마친뒤 곧바로 김피고
인의 공작원 선박 및 교육과정, KAL기 폭파과정등에 관한 검찰측 직접신문이
6시간가량 진행됐다.
김은 단정하게 빗어내린 긴머리에 푸른색 체크무늬 점퍼와 베이지색 바지
차림에 흰색 운동화를 신었으며 공판시작전인 상오9시35분께 경찰과 법원직
원들의 삼엄한 경비속에 안기부의 쥐색 로얄승용차편으로 법정에 도착했다.
긴장된 표정의 김은 재판부의 인정신문에 흐느끼는 목소리로 답변했으며
검찰의 직접신문에서도 시종일관 "예"라며 공소사실 모두를 순순히 시인했다.
이날 재판에는 이 사건 수사검사인 서울지검 공안1부 이상형, 차동민 검사
등 2명이 관여했으며 변호인으로는 안동일, 정재헌 변호사등 2명이 국선변호
인으로 참석했다.
김은 직접신문에서 "1962년 1월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에서 당시 북괴
정무원외교지원으로 종사하던 김원석과 림명식의 2남3녀중 장녀로 태어나 평
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80년 3월께 북괴조선노동당 중앙
위원회조사부소속 공작원으로 소환돼 같은해 4월부터 7년8개월동안 대남공작
작원 양성기관인 평양소재 금성정치군사대학, 동북리초대소, 룡성초대소등지
에 수용돼 군사훈련과 간첩전문교육,외국인화교육,해외실습교육등을 받았다"
고 진술했다.
김은 또 "초대소에 입소한뒤 노동당 조사부 강해룡부부장으로부터 ''동무는
앞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부문에서 싸우게 되는데 이를위해 열심히 학습해야
한다'' ''당에서 선발해온 동무이므로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하리라 믿
는다'' ''며칠 수교육을 받게 될 학교에 보내겠으니 그곳에 가서 잘 학습하고
훈련하라''는등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히고 "80년 4월부터 81년 4월까지 1년
동안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공작원으로 함께 선발된 김숙희와 함께 ''김일성
혁명역사'' ''항일무장투쟁시기의 회상기''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에 관한 김
일성의 사상과 이론''등에 관해 교육을 받은뒤 졸업했다"고 말했다.
김은 이어 "공작원교육을 마친뒤인 84년 7월초순께 노동당간부로부터 공작
원 김승일(70/음독자살)을 소개받고 ''일본인 부녀관광객으로 위장하고 해외
여행을 하면서 남조선에 들어갔다'' 오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날 공판은 엄격한 방청제한이 이루어진 가운데 열렸으며 희생자 유가족
20여명과 내/외신기자 60여명이 사전에 방청권을 발부받아 공판모습을 지켜
보거나 취재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달리 김의 신변보호를 위해 투명플라스틱
방패나 방탄막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김은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유가족들이 "내아들, 내남편을 살려내라"며 울
부짖자 한동안 신문에 응하지도 못한채 미리 준비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리기도 했다.
재판부는 앞으로 김에 대한 공판을 3-4차례 계속한뒤 오는 4월말께 구형과
정을 거쳐 신고할 방침이다.
검찰은 KAL기 폭파주범인 김에게 사형을 구형할 방침이며 정부측은 형이 확
정되는대로 특별사면절차를 통해 규명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법정주변에는 정/사복경찰 1,500여명이 배치돼 만일에 사태에 대
비, 철저한 경비를 폈으며 법정으로 들어가기까지 모두 5군에 경비소를 설치,
방청객들의 소지품등을 검색했다.
반혐의로 불구속기소된 김현희 피고인(28)에 대한 첫 공판이 사건발생 464일,
기소된지 32일만인 7일 상오10시 서울형사지법대법정에서 열렸다.
서울형사지법 합의10부심리로 열린 이날 공판에서 김피고인의 출생연도와
출생지, 현주소등을 묻는 재판부의 간단한 인정신문을 마친뒤 곧바로 김피고
인의 공작원 선박 및 교육과정, KAL기 폭파과정등에 관한 검찰측 직접신문이
6시간가량 진행됐다.
김은 단정하게 빗어내린 긴머리에 푸른색 체크무늬 점퍼와 베이지색 바지
차림에 흰색 운동화를 신었으며 공판시작전인 상오9시35분께 경찰과 법원직
원들의 삼엄한 경비속에 안기부의 쥐색 로얄승용차편으로 법정에 도착했다.
긴장된 표정의 김은 재판부의 인정신문에 흐느끼는 목소리로 답변했으며
검찰의 직접신문에서도 시종일관 "예"라며 공소사실 모두를 순순히 시인했다.
이날 재판에는 이 사건 수사검사인 서울지검 공안1부 이상형, 차동민 검사
등 2명이 관여했으며 변호인으로는 안동일, 정재헌 변호사등 2명이 국선변호
인으로 참석했다.
김은 직접신문에서 "1962년 1월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신동에서 당시 북괴
정무원외교지원으로 종사하던 김원석과 림명식의 2남3녀중 장녀로 태어나 평
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80년 3월께 북괴조선노동당 중앙
위원회조사부소속 공작원으로 소환돼 같은해 4월부터 7년8개월동안 대남공작
작원 양성기관인 평양소재 금성정치군사대학, 동북리초대소, 룡성초대소등지
에 수용돼 군사훈련과 간첩전문교육,외국인화교육,해외실습교육등을 받았다"
고 진술했다.
김은 또 "초대소에 입소한뒤 노동당 조사부 강해룡부부장으로부터 ''동무는
앞으로 조국통일을 위한 부문에서 싸우게 되는데 이를위해 열심히 학습해야
한다'' ''당에서 선발해온 동무이므로 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잘하리라 믿
는다'' ''며칠 수교육을 받게 될 학교에 보내겠으니 그곳에 가서 잘 학습하고
훈련하라''는등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히고 "80년 4월부터 81년 4월까지 1년
동안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공작원으로 함께 선발된 김숙희와 함께 ''김일성
혁명역사'' ''항일무장투쟁시기의 회상기'' ''남조선혁명과 조국통일에 관한 김
일성의 사상과 이론''등에 관해 교육을 받은뒤 졸업했다"고 말했다.
김은 이어 "공작원교육을 마친뒤인 84년 7월초순께 노동당간부로부터 공작
원 김승일(70/음독자살)을 소개받고 ''일본인 부녀관광객으로 위장하고 해외
여행을 하면서 남조선에 들어갔다'' 오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이날 공판은 엄격한 방청제한이 이루어진 가운데 열렸으며 희생자 유가족
20여명과 내/외신기자 60여명이 사전에 방청권을 발부받아 공판모습을 지켜
보거나 취재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당초 예상과는 달리 김의 신변보호를 위해 투명플라스틱
방패나 방탄막등을 설치하지 않았다.
김은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유가족들이 "내아들, 내남편을 살려내라"며 울
부짖자 한동안 신문에 응하지도 못한채 미리 준비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리기도 했다.
재판부는 앞으로 김에 대한 공판을 3-4차례 계속한뒤 오는 4월말께 구형과
정을 거쳐 신고할 방침이다.
검찰은 KAL기 폭파주범인 김에게 사형을 구형할 방침이며 정부측은 형이 확
정되는대로 특별사면절차를 통해 규명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법정주변에는 정/사복경찰 1,500여명이 배치돼 만일에 사태에 대
비, 철저한 경비를 폈으며 법정으로 들어가기까지 모두 5군에 경비소를 설치,
방청객들의 소지품등을 검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