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공방(漢詩工房)] 送春(송춘), 姜聲尉(강성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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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送春(송춘)姜聲尉(강성위)

芳花謝了滿山靑(방화사료만산청)
細雨霏霏布穀聽(세우비비포곡청)
春日傷悲如草長(춘일상비여초장)
何時得釤刈心庭(하시득삼예심정)

[주석]
* 送春(송춘) : 봄을 보내다.
* 芳花(방화) : 향기로운 꽃. / 謝了(사료) : <꽃 따위가> 져버리다. / 滿山靑(만산청) : 산 가득 푸르다, 온 산이 푸르다.
* 細雨(세우) : 가랑비. / 霏霏(비비) : 부슬부슬 내리는 비나 가늘게 내리는 눈발. 부슬부슬. / 布穀聽(포곡청) : ‘布穀’은 뻐꾸기, ‘聽’은 듣다 내지 들리다이므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리다, 뻐꾸기가 울다로 이해하면 된다.
* 春日(춘일) : 봄날, 봄. / 傷悲(상비) : 마음 아파하며 슬퍼함, 시름. / 如草長(여초장) : 풀과 같이 자라다.
* 何時(하시) : 어느 때에. / 得釤(득삼) : 낫을 얻다, 낫이 생기다. / 刈心庭(예심정) : 마음의 뜰을 베다.[번역]
봄을 보내며

향그런 꽃 져버려 온 산 푸른데
가랑비 부슬부슬 뻐꾸기 울음 울다
봄날 시름은 풀처럼 자라거늘
어느 때 낫을 얻어 마음의 뜰 베리오

[시작노트]
이 시는, 필자가 몇 해 전에 “봄이 간다커늘”로 시작되는 시조를 한역하고 이를 칼럼으로 작성하여 발표하면서 소개한 적이 있다. 그때 필자는 이 시 앞머리에 아래와 같은 짧은 글을 덧붙였더랬다.
심사가 고단하면 봄날 시름이 없을 수 없다. 세월이 가도 시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어떤 시름이 사라졌다 해도 새로운 시름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의 뜰에 지금도 시름의 풀이 무성하니, 역자가 막바지 총각 시절에 지은 아래 시는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말한 그대로 이 시는 필자가 막바지 총각 시절에 지은 것이다. 그러니까 지은 지 30년이 넘었다는 얘기이다. 필자는 공부와 연애 둘 다 여의치 못했던 그 당시에 이 시를 고향 집에서 지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5월 말이던가 6월 초 무렵에 고향에서 며칠 묵을 적에 지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대목에서 필자가 시를 지은 장소를 굳이 밝히는 이유는, 묘사한 풍경이 모두 그 무렵 고향의 실경(實景)이기 때문이다. 실경이란 실제의 경치나 광경이라는 말이다. 학창시절에, 옛사람들이 시를 지을 때 간혹 보여주었던 병폐 가운데 하나인 ‘무병신음(無病呻吟)’, 곧 병이 아닌 데도 괴로워 앓는 소리를 내는 걸 매우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어느 선생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필자는 어설프게나마 시를 지을 때는 물론 짧은 글을 쓸 때조차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사실 그대로 적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더랬다.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이 시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음은 물론이다. 다만 성취가 보잘것없는 것이야 논외로 해야겠지만 말이다.

그 언젠가 몇몇 지인들에게 ‘의식적인 노력’을 얘기하면서 이 졸시를 예로 들었더니, 지인 하나가 문득 ‘滿山靑(만산청:온 산이 푸르다)’은 봄의 풍경이 아니지 않느냐며 의문을 제기하였다. 주지하다시피 비교적 가까이서 보는 초봄의 산 빛깔과 늦봄의 산 빛깔은 확연히 다르다. 나무마다 잎의 속성이나 그 잎이 자라는 속도 등이 달라 이른 봄철에는 알록달록한 초록빛으로 보이던 산이, 거의 한 톤(tone:색조)의 푸른 빛으로 수렴되는 계절이 바로 늦은 봄인데, 지인은 이른 봄철의 산 빛깔을 기억 속에 깊게 각인하고 있던 터여서 필자에게 그렇게 얘기한 것이었다. 새삼 느끼는 사실이지만, 어떤 경우든 현상(現狀)을 있는 그대로 적지 않으면 거짓이 된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를 적은 것은, 설혹 잘못 본 것일 수는 있어도 거짓은 아니다.

필자는 이 시를 짓던 그 날,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고향 집 툇마루에 비스듬히 누워 멍하니 가랑비를 보고 있다가 불현듯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었다. 보통 때는 한적하고 청아하게만 들리던 그 소리가 그날따라 어찌나 처량맞게 들리던지! 당시 필자의 심사가 그러했으니 소리 또한 그러했을 것임은 자명한 이치이다. 툇마루에 스미는 한기로 인해 몸을 바로 세운 후에 이른 봄이면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어나던 앞산 께로 눈길을 던지고 있자니, 마당 가장자리에 무성한 잡초가 빗물을 머금은 채 바람에 두서없이 흔들리는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3, 4구의 비유를 생각해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필자가 허둥대며 급하게 필기도구를 찾았던 기억이 아직껏 또렷하기만 하다.누구나 어떤 특정 시기가 되면 특별히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거나,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있거나, 특별히 떠오르는 시구 혹은 글귀 등이 있기 마련이다. 봄과 여름이 갈마드는 즈음이면 어김없이 뇌리에 떠올라 필자를 사념에 젖게 하는 이 시가, 필자에게는 바로 그런 유(類) 가운데 하나가 된다. 꼭 명품이라고 해서 더 애착이 가는 것은 아니듯, 꼭 잘 지은 것으로 여겨지는 시여서 더 잘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름이 사라졌다 해도 새로운 시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야 마는, 마치 도돌이표와 같은 인생 역정이 바뀌지 않는 한, 비 내리는 늦은 봄이면 이 시를 떠올리는 필자의 버릇은 아마 쉽사리 고쳐지지 않을 듯하다.

필자는 이 시를 지은 후로 몇 차례에 걸쳐 송춘시(送春詩)를 지었더랬다. 그러나 솔직하게 밝히자면 번번이 실패했던 셈이다. 그 사이에 지었던 몇 수의 송춘시는 지은 그 임시에 이미 다 버렸기 때문이다. 우선 내 마음에도 들지 않는 시를 어딘가에 보관한다는 것은,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하품(下品)을 파쇄(破碎)하지 않고 그대로 어딘가에 두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하다.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 힘들게 지은 시를 버려야만 하는 것 또한 시름의 하나가 되니, 시름이 풀처럼 자라는 것을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혹 시를 짓지 않는다면 괜찮아질 법도 하지만, 그때는 아마 시를 짓지 않거나 못 짓는 것이 다시 하나의 시름이 되어 마음의 뜰을 거칠게 하지 않을까 싶다. 봄을 보낼 적이면 이래저래 필자는 시름이 많다.

오늘 소개한 필자의 이 시는 칠언절구이며 압운자는 ‘靑(청)’, ‘聽(청)’, ‘庭(정)’이다.2024. 5. 14.

<한경닷컴 The Lifeist> 강성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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