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순네는 짐승 같은 직감으로 귀녀의 임신 사실을 알아채지

[arte] 손태선의 '발레 화가의 서재'
토지, 등장인물의 위태로움
수많은 등장인물과 토지 / 필자 제공
“남의 종이 되기도 싫지만 남의 주인도 되고 싶지 않다”던 박경리 선생님은 꼭 한번 만나뵙고 대화해보고 싶은 분이었다.

긴 소설이 끝나갈 때면 몹시 서운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아껴 읽게 되고, 1권부터 다시 곱씹어 본다. 결국 21권째 소설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끝이 나지만…. 어떤 일에도 감동되지 않을 눈빛, 철저하게 스스로를 거부하는 눈빛, 눈빛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뼈만 남은 몸 전체가 거부로서 남을 학대하는 분위기의 응결이었다. 어린 시절 서희가 바라보는 아버지 치수의 외향에 대한 묘사다. 치수는 자신의 아내와 도망친 구천을 쫓으러 산에 가는데, 강포수와 동행한다.

“계집이란 근본부터 괭이 같은 것이라 잠시라도 쓰다듬어주지 않으면 달아나게 마련 아닙니까” 사냥에 미친 강포수를 빗대어 평산이 치수에게 하는 말이다. 최치수의 지체, 최치수의 재물, 최치수의 학식, 최치수의 오만 그런 것들이 말할 수 없는 큰 덩어리가 되어 평산 자신을 그 밑에 짓눌리어 자꾸 작아지는 것 같은 생각이 그를 슬프게 했고, 걷잡을 수 없게 안정을 잃게 했던 것이다.

몰락 양반의 후예이자 최치수의 재종형인 조준구의 암시에 의해, 김평산은 사냥에서 오발 사고를 가장해 최치수를 살해한다. 이 과정에서 최참판댁 계집종인 귀녀는 자수당에서 칠성과 추악하고 비인간적인 밀회를 거듭하는데, 이는 ‘행위는 오로지 목적을 위한 것’이라는 한마디 말로 정리된다. 그들이 밀회를 거듭하던 중 뒤따라 온 강포수와 귀녀는 하룻밤을 보내고, 귀녀는 강포수의 아이를 임신한다.
등장인물의 위태로움을 표현한 작품 ©손태선
최치수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데에는 봉순네의 직감이 있다. 추진력이 있는 것도 아니요, 사태를 판단할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직감이며 본능이다. 해를 끼칠 적을 느낌으로 판별하는 그 짐승의 본능 같은 것. 그것으로 봉순네는 귀녀의 임신 사실을 알아고, 윤씨 부인은 귀녀를 가두고 공모자들을 실토하게 한다. 귀녀는 치수의 사랑을 얻어 아이를 낳고 면천하고 싶었으나 거절당하자, 치수를 죽이는 음모에 가담한 것이다. 귀녀는 임신한 아이가 최치수의 아이라고 우기지만 최치수가 성불구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윤씨 부인은 최치수의 어머니이자, 서희의 할머니이다. 요절한 남편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연곡사에 갔다가 휴양차 온 김개주에게 겁탈당하여 비밀리에 아들 김환을 낳는다. 김환은 오랜 시간이 지나 윤씨 부인에 대한 복수심을 가지고 최참판가에 찾아간다. 이름은 밝히지 않고, 구천동에서 왔다하여 구천이로 불리며 별당 아씨와 비밀리에 사랑을 나누다가 윤씨 부인의 도움을 얻어 산으로 도망한다. 별당 아씨는 윤씨 부인의 또다른 아들인 최치수의 아내이다. 그러니 별당 아씨는 윤씨 부인의 며느리인 셈이다. 두 아들의 한 며느리...

“약살 돈이 어디 있노”, “초상 치는 데는 돈 안드까” 찰지게 받아친다.양반과 상놈 사이에 시비는 성립될 수 없다. 응징이 있을 뿐이다.

[다음 회에 계속]

손태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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