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심드렁한 중년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가

[arte] 최윤경의 탐나는 책
『삶과 나이』로마노 과르디니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6년
마흔을 넘어서며 입버릇처럼 나이를 핑계 삼았다. 체력이 떨어지고 여기저기 아픈 것도,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것도, 일상이 심드렁한 것도 “나이 들어 그렇지”라며 체념인지 위안인지 모를 말로 넘겼다.

시간이 흐를수록 농담처럼 내뱉던 말에 발목 잡히기 시작했다.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 계획이 어그러지는 일이 잦아졌고, 내 몸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열의가 넘치는 이들이 부러웠으며 나의 무력감을 탓하다 보면 삶이 보잘 것 없게 느껴진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나의 전성기는 이제 끝난 것일까. 이른바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지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탈리아 출신의 독일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는 이를 ‘한계 경험의 위기’라는 말로 표현한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의 가치를 맹렬히 좇는 사람들에게 삶의 본질을 일깨우기 위한 강연을 열었는데, 이 강연을 묶은 책이 <삶과 나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삶의 시기를 나이에 따라 유년, 청년, 성년, 중년, 노년, 말년으로 구별하고, 인간이 각각의 시기마다 고유한 특성과 전형적인 위기를 겪으며 더 완성된 삶을 향해 나아감을 보여준다.
삶과 나이-표지
그가 말하는 한계 경험의 위기는 원기 왕성한 성년기(20대 중반~40대 중반) 이후에 찾아든다. 힘든 과제를 기꺼이 떠맡고 빛나는 성취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던 성년기의 인간은 점점 무슨 일이든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그에 반해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요구사항은 늘어만 간다. 새로운 일과 만남이 가져다주던 설렘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익숙하고 뻔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건 새롭지 않은데’, ‘다 해봤잖아.’ 그럴듯한 결과물을 내지 못하는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중년의 문턱에 선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것이다.

한계 경험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삶을 냉소하고 회의하거나 무작정 낙관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삶을 긍정할 줄 알아야 한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이들을 ‘각성한 인간’이라 부른다. 각성한 인간은 삶의 제약과 결핍, 부족함과 비루함을 그저 “받아들인다.”

이 시기에 우리가 우러르는 이들은 찬란하고 화려한 성공을 이룬 사람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이어지는 일상을 묵묵히 견디는 사람이다.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혹에 휩쓸리거나 무모한 도전에 혹하지 않고, 의무 그 자체를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로마노 과르디니
세상에 대한 흥미가 줄어들고, 일은 버겁고, 일상의 반복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져 일을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한 선배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고민은 뼈와 살을 갉아 먹을 뿐이니, 고민 말고 그냥 해.”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를 만날 때마다 “뭐 재미난 일 없냐”고 묻던 그 선배는 한계 경험의 위기를 넘어서 각성한 인간이 된 것일까. 이후에도 또 다른 위기가 선배에게도, 나에게도 다시 들이치겠지만, 여전히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우리의 일상도 그 자체로 의미 있음을 믿는다면, 그 또한 지나가리라.
대학에서 강연하는 로마노 과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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