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귀고리 소녀, 한복 입은 남자의 공통점… 명화가 힌트 준 소설

[arte] 소심이의 참견
‘작가의 말’이 너무 궁금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먼저 읽고 싶은 작품들이 있다.
‘대체 이 작가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을까?’ 찰나의 순간을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소설가들의 영감. 그것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소설이 있는 것을 보면 작가들의 영감의 원천은 그 이상으로 다양할 터.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어떤 순간일 수도, 매일 반복해서 인지하지 못했던 오랜 습관을 인지한 순간일 수도, 새로운 여행지에서의 낯섦과 설렘일 수도…… 그리고 어떤 소설가는 미술관에서 그 영감을 받았음이 확실하다.

트레이시슈발리에 장편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는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북유럽의 모나리자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한 ‘진주 귀고리 소녀’와 동명 소설이다.
미묘한 표정, 푸른색의 터번과 그리고 소녀와 어울리는 듯 하지만 다소 과한 듯 강조된 진주 귀고리 그리고 정면이 아닌 살짝 뒤를 돌아보고 있는 몸짓은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이 작품을 기억하게 하는 미력과 강렬함이 있다.

작가 트레이시슈발리에는 이 순간의 표정을 소설로 풀어낸다. 타일 도장공의 딸 그리트는 폭발 사고로 아버지가 두 눈을 잃게 되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화가 베르메르 집의 하녀로 들어간다. 그녀에게 주어진 미션은 모든 물건이 완벽하게 제자리에 있도록 유지하면서 화실을 청소하는 것. 하녀 그리트에게 그림에 대한 재능을 발견한 베르메르는 그녀의 귀에 진주 귀고리를 걸고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트레이시 슈발리에
이 소설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또 한가지 비밀은 그림 속에 있다.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는 ‘트로니’로 특정한 인물의 초상화가 아니라, 인물의 표정이나 생김새를 연구하기 위해 그린 두상화이기 때문. 실제 그림의 제목이나 그려진 연도도 정확하지 않을뿐 아니라 ‘진주 귀고리 소녀’라는 이름 또한 20세기 후반에 붙여졌다고 한다. 허구와 허구가 만났으니 누구의 영감이 더 대단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화가와 작가의 영감이 묘하게 소녀로 구현되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신기하다. 닮은꼴의 스케치에서 시작해 역사와 상상력의 발란스가 기가 막히게 꼭 들어맞는 이야기가 있다.
연출가이자 작가인 이상훈 님의 ‘한복입은 남자’. 방대한 역사적 고증은 어쩌면 이 이야기가 완벽한 허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작가는 세종대왕에 대한 영화를 준비하던 중 세종의 가마를 잘못 설계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장영실에 주목하면서 자료를 조사하던 중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기중기, 다연발 로켓, 물시계, 비차 모형도 등 다빈치의 스케치와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되고, 세종이 총애를 받던 중 갑자기 역사 속에서 사라진 천재 과학자 장영실과 다빈치가 어쩌면 서로 조우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증명해가는 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 이야기에도 중요한 한 장의 그림이 등장한다. 그것은 바로 서양인이 그린 최초의 한국인 그림으로 유명한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 A Man in Korean Costume’. 방송국 PD인 주인공 진석은 이 그림속의 주인공을 규명하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하면서 우연히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에 왔다는 엘레나 꼬레아라는 이탈리아 여성을 만나게 된다.그녀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물이라며 한 권의 책을 건넨다. 비망록(備忘錄)이라고 적혀있는 이 책에는 온갖 기이한 그림들과 함께 한글, 한자, 이탈리아어의 주석들이 뒤섞여 있다. 진석은 이 책을 재야 학자이자 헌책방 세한도의 주인인 강배에게 번역을 부탁하게 되고 그로부터 이 비방록의 저자가 다름 아닌 장영실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루벤스의 한복입은 남자
특히 장영실을 사랑한 세종이 위기에서 그를 구하고자 의도적으로 부서질 수밖에 없는 가마의 설계를 맡기고 그 책임을 물어 명나라의 위대한 모험가 정화 대장을 끌어들여 그를 빼돌린다는 이야기는 기발하고 신선하다.

‘진주 귀고리 소녀’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 등장하는 그림의 숨겨진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루벤스의 ‘한복 입은 남자’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인 소년을 이탈리아 상인 안토니오 카를레티에게 팔았다는 일본 기록에 근거하여 조선인 소년에게 안토니오 꼬레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소년이 그림 속 주인공이라는 주장이 다수설로 받아들여졌다.그러나 그림 속 남자가 입고 있는 한복을 살펴보면 이 옷은 성인 남자의 의복이며, 하단을 보면 속치마를 입은 것처럼 겉옷 밖으로 안에 받쳐 입은 옷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겨 입었던 철릭 위에 팔소매 밑단이 없는 답호라는 옷을 덧입었다는 고증을 바탕으로 하면 그림 속 주인공의 의복이 조선 초기, 최소한 임진왜란 이전의 복식으로 그림 속 주인공은 조선 전기의 인물이거나 그 후손임을 의미한다.

천재 이야기꾼 박민규님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림 이야기를 하다가 어찌 음악 이야기인가 하겠지만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피아노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라스메니나스(시녀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 중간에 있는 작은 거울에 비친 두 인물이 마리아나 왕비(왼쪽)와 펠리페 4세다.
성공한 작가인 주인공은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들으며 잊지 못할 여인을 추억한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 그녀는 주인공에게 모리스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선물했고, 그날 그 카페엔 벨라스케스의 그림 라스메니나스(시녀들)’이 걸려있었다.

그림 속의 아주 못생겼지만 자꾸만 시선을 잡아 끄는 여인은 항상 그녀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늦깎이에 인기 배우가 된 잘생긴 남자였고, 어머니는 그런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못생긴 여자. 성공을 거머쥔 아버지는 결국 가족을 떠나고, 어머니는 슬픔과 절망 속에 삶을 이어간다.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주인공은 못생긴 그녀를 만나게 되고 서로 사랑했고, 즐거웠으며 늘 함께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녀는 스스로 외모로 인한 성처를 이겨내지 못하고 주인공 곁을 떠나게 된다. 이후 소설가로 성공한 주인공은 그녀가 독일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만나러 떠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죽은 왕녀 곁에 들러리 선 시녀와 마찬가지라는 작가는 누구나 예뻐지고 싶고, 부유해지고 싶고, 세련되고 싶었던 지나간 우리의 모습을 투영한다. “아마도 이 소설은 가장 못생긴 작가가 쓰는 가장 못생긴 여자를 위한 선물일 것”이라며 “길고 긴 연서를 쓰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썼다”는 작가의 말이 따뜻하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오랫동안 2023년을 기억하게 할 한 장의 그림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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