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아들 독살 의혹을 파헤치기는커녕 며느리까지 죽였다

[arte] 강희찬의 역사영화-진실과 거짓
사진출처 = 다음영화
끔찍한 독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부검을 할 순 없으니 진실을 밝히긴 어렵지만 독살에 연루된 조선왕들이 여럿 있다. 독살을 시도한 주체는 다양하다. 고종은 일본이, 정조는 신하들이, 경종은 동생 영조가 범인이라고 한다. 영화 <올빼미>는 조선 16대 왕 인조가 아들 소현세자를 독살한 이야기다.

독살이 사실이라고 믿는 쪽은 세 가지 근거를 든다.1.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에 포로로 있다가 영구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몸이 아팠고 3일 뒤에 죽었다는 건 너무 갑작스럽다.
2.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사람은 인조의 측근이었던 어의 이형익이었고 시체는 검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이 흘러나왔다. (1645년 인조실록) 즉,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3. 인조는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으며 이후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을 죽이고 손자들도 제주도로 보내어 죽게 만든 점. 인조의 이런 광기와 정황증거로 볼 때 독살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독살이 아니라는 근거는 아래와 같다.

1. 질병설이다. 소현세자는 중국 심양에 있을 때부터 질병에 시달렸고 계속 약을 받아 복용할 정도였다.
2. 귀국길에도 몸이 좋지 않아 중도에서 며칠간 요양을 하다 다시 출발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3. 본래 다른 어의들이 진료했으나 차도가 없자 이형익이 침을 놓아 상태가 호전되었고 소현세자 자신도 다 나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다 상태가 다시 나빠지자 이형익이 침을 놓은 것이다. 요컨대 당시의 의료기술 부족 탓이다.
4. 아들이 죽은 뒤 인조는 원래 허약체질인 아들이 며느리의 지나친 성욕으로 기력을 잃은 것이 원인이라고 강빈을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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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설의 진실을 밝히긴 어렵지만 이후의 사건들로 볼 때 인조는 분명 아들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궁금증이 생긴다. 아들의 죽음에 아버지가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인조는 아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였다. 병자호란이 나고 남한산성에 갇혀 있을 때 인조를 사로잡은 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결국 청 황제에게 엎드려 절하는 치욕의 항복의식을 치르고 대신 아들을 중국에 포로로 보냈다.

두 번째, 아들이 심양에 있을 때도 체류비용을 충분히 보내주지 못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로부터 받은 땅을 경작하고 조선에서 들여온 물품을 팔면서 체류비용을 충당했다.셋째, 아들이 일시 귀국했을 때도, 영구 귀국했을 때도 환영잔치 제대로 한 번 열어주지 못할 정도로 속이 좁았다.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경제적으로도 뒷받침 하지 못하고, 넓은 품도 내어주지 못했으니 아들에게 면목 없는 아버지 맞다.

그런데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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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청에 있을 때 인조는 40대로 아직 젊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마음속에 의구심이 싹트기 시작한다. 자식이 심양에서 쌓은 청의 지도부와의 관계, 보고 들은 것, 이런 것들이 아들의 정치적 자산이 되고 결국 왕위를 위협할지 모른다고.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기, 승전국이자 황제국인 청이 자신을 언제든 폐위시킬 수 있다고 불안에 떨었다. 오죽하면 자식의 영구 귀국이 청의 계획과 모종의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실제로 병이 나서 앓아누워버렸다.

아들은 죽었다. 구실을 만들어 며느리에게 사약을 내렸고 손자들도 귀양 보내 결국 다 죽게 만들었다. 그 뒤로 인조는 5년을 더 왕의 자리에 있었다. 이런 난리를 겪고 지켜낸 왕의 자리치고는 너무 짧았으니 인조가 안됐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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