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극장과 영화 자이언트, 그리고 석유의 역사 [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건물과 건축의 차이는 무엇일까. 건물은 용도가 끝나면 허문다. 건축은 쓸 일이 없어도 그냥 놔둔다. 1999년 말에 철거된 국도극장은 건물이 아니라 건축이었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유럽 궁전풍의 이 극장이 무너질 때 나는 이 나라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뒤늦게 서울시가 역사성을 띤 근대 건축물 보전을 위해 재개발 금지와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더 미웠다.

2000년에 해체되어 지금은 복합 상영관으로 바뀐 대한극장의 한 때 별명이 ‘벤허 극장’이다. 1962년 2월부터 무려 7개월 간 영화 ‘벤허’를 장기 상영했기 때문인데 당시 이 영화를 ‘제대로’ 틀 수 있는 극장은 대한극장 하나 밖에 없었다. 국내 최초로 70mm 필름을 원형 그대로 상영할 수 있는 영사기를 들여왔고 음향 시설도 당대 최첨단이었다. 1층 가운데 좌석에 앉으면 스크린이 한 눈에 안 들어왔다. 가로 24미터에 세로 19.5미터라는 경이적인 사이즈 때문인데 스크린 왼쪽에서 사람이 등장해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시선이 인물을 따라가야 했다. 요즘 복합 상영관에서는 15미터 이상의 스크린을 대형 상영관으로 분류하며 좌석 수는 400석 남짓이다. 대한극장은 1920석이었다. 마지막 회 상영이 끝나면 고양이를 풀어 쥐를 잡았다는 극장 관계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충무로는 원래 뻥이 좀 세다. 관객들이 과자 부스러기를 흘리면 얼마나 흘린다고.

아쉬운 건 대한극장에서 영화 ‘자이언트’를 보지 못한 거다(물론 소생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고). 국내 개봉이 1957년이었고 대한극장 개관은 1958년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자이언트’를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의 석유 버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진심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이루지 못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인종 문제와 페미니즘이다. 당시에는 국내에 없던 개념들이라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고 ‘자이언트’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스크린에 등장한 최초의 페미니스트였다.
국제극장과 수도극장에서 동시 개봉했다. 한 영화를 두 극장에서 동시에 상영하는 일이 흔치 않던 시대라 그것도 화제였다. 촬영 당시 테일러와 딘은 23살 동갑, 록 허드슨은 29살이었고 테일러의 딸로 나온 캐롤 베이커는 테일러보다 나이가 많았다. ‘자이언트’는 제임스 딘의 유작이기도 하다.
그녀는 남편으로 나왔던 록 허드슨과 촬영장 밖에서도 ‘베프’였다. 남녀 관계 전혀 아니고 남사친, 여사친이었는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산후 우울증, 록 허드슨은 성 정체성 문제로 속을 터놓을 상대가 필요했다. 제임스 딘이 연기한 제트 링크의 실제 모델은 미국의 석유 재벌 글렌 맥카시다. 개봉 직후 맥카시의 측근들은 제임스 딘이 실제 인물의 화려한 성격을 전혀 살리지 못했고 심지어 ‘계집애’처럼 나왔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영화 속에서 목장 잡부로 일하던 제임스 딘은 농장주에게 땅을 유산으로 조금 받아 그곳에서 석유가 나는 바람에 인생 역전에 성공한다. 그는 혼자서 석유 시추에 매달리는데 영화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어지간한 부호들도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매진해야 성공할까 말까 한 게 석유 시추로 무일푼 잡부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석유하면 중동이 떠오르지만 그것은 1938년 이후의 일이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자 아랍 세계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맹주 자리를 놓고 각개약진이 시작되었고 이 중 두각을 나타낸 게 아라비아 반도의 사우드 가문과 하심 가문이다. 사우드 가문에서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사우디아라비아가 나왔고 하심 가문에서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나왔다. 1932년 개창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당시 유럽 열강들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영토라고 선언한 것이 대부분 사막이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모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후 그 사막에서 석유가 쏟아져 나와 이들을 당혹스럽게 한다. 건국으로부터 불과 6년 후였다.

이전까지 석유의 역사는 미국의 역사와 함께 진행된다. 1857년 변호사, 은행장 등으로 구성된 한 유력 투자그룹이 펜실베이니아에서 최초로 석유 시추를 개시한다. 땅을 파는 대신 구멍을 뚫어 굴착하는 방법이었는데 중국은 이미 1500년 전 소금을 얻는 방법으로 염정시추(鹽井試錐)라는 굴착법을 개발했고 1830년경에는 이 기술이 유럽으로 전파되어 어느 정도 활용되고 있었다. 영화에서처럼 삽으로 파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예일대 화학교수에게 조사 용역까지 의뢰한 후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석유가 지하의 석탄 광맥에서 떨어지는 ‘기름방울’이라고 생각하던 시대였고 땅에서 석유가 나온다거나 물처럼 펌프로 석유를 뽑아 올린다는 발상 자체가 꿈같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석유는 두통, 치통, 위경련, 류머티즘 등의 치료에 의약품으로 쓰이고 있었다. 투자자 그룹이 궁금했던 것은 펜실베이니아에서 소량으로 채취되던 석유를 광원(光源)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수백 년 동안 사용해 온 향유(香油)고래 기름의 수요가 계속해서 늘어난 끝에 고래의 개체 수 자체가 줄어들자 이를 타개할 묘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2년여에 걸쳐 들어간 엄청난 사업비에 질린 투자그룹이 손을 들기 직전인 1859년 8월 지하 69피트 지점에서 드디어 석유가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이 새로운 에너지원에 주목한 사람이 나중에 석유왕으로 불리게 될 록펠러였다.
前 숭실대 예술학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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