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하는 또 한 명의 단색화가 권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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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CMO Insight■ 「인생, 예술」저자 윤혜정권영우는 자유로운 작가였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동서양 구분 없이 그저 그림이고 회화였다. 동양화의 핵심인 지필묵 중에 붓과 먹을 과감히 버리고 종이(한지)를 현대적으로 취했다. 어떤 그림을 그릴지 전전긍긍한 게 아니라 아예 그림을 제거하고 수행적 행위 자체를 화면으로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권영우를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단색화가’로 정의한다는 것은 단색화에서 자유와 혁신을 발견했다는 뜻과 다름없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미술 작업은 보는 이들을 동시대인으로 만든다.“내 작업은 화선지로 캔버스를 만드는 일로 시작됩니다.” 살아생전 권영우는 자신의 작업을 그저 종이 바르는 일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모두가 잠든 후, 세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 되어 적요한 밤이 저물 때까지 종이의 물성과 씨름했다. 한지 중에 가장 얇고 질기고 투명하다는 화선지는 한 장씩 여러 장 겹쳐 발랐다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면 하드보드지처럼 딱딱해진다.
마케터를 위한 (문화 서적) 저자 기고
권영우는 이렇게 직접 고안한 새로운 개념의 화면에 찢고 뚫고 자르고 붙이고 밀어 올리는 일련의 행위를 펼쳐 보였다. 손가락이나 손톱을 이용했다가, 필요하면 나무 꼬챙이나 쇠붙이를 썼다가, 그래도 부족하면 도구를 아예 개발했다. ‘추상을 그리는 게 아니라 추상적 현상을 만든’ 그의 작업에서 한지는 캔버스가 되었다가, 붓이 되었다가, 먹이 되었다가, 물감이 되었다가, 마침내 회화 그 자체가 되었다.
권영우의 백색 작업을 보고 있자면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파격과 절제 사이에서 생생하게 줄타기한다는 느낌이 든다. 빛 바랜 흰색은 여전히 의젓하고, ‘침범’ 당한 표면은 자연스레 여백과 음영 그리고 형태를 생성하며, 구조화된 종이의 질감은 색채의 뉘앙스와 소통한다. 겹쳐진 화선지의 장수(張數)도, 풀의 양도, 마르는 정도도 일정치 않기에 종이가 찢기고 뚫릴 때의 상황도 다 다르고, 각각은 저마다의 운율을 지닌 작품으로 거듭난다. 무구(無垢)와 무위(無爲)라는 화선지의 본성을 존중한 작가는 인위성(작가의 의지나 의도)이 야기한 자연성(우연 혹은 현상)도 작품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였다.“동서양의 경계가 없다”는 작가의 선언은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명백한 사실이기도 하다. 해맑은 빛의 한지를 활용한 그의 작업은 방법론적인 면에서 서구 추상미술주의와 궤를 같이했다. 그의 작품이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커팅 페이퍼(paper cut-out),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파피에콜레(papier collé),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의 공간 개념(Concetto spaziale) 시리즈 등과 나란히 언급된 이유는 이들이 아니면 도저히 비교 대상을 찾지 못할 만큼 희귀했기 때문이다.중요한 건 이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도유망한 동양화가가 제시한 새로운 어법이 낯설었던 당시 미술계는 그에게 한국적 자연주의의 명분과 한지 미학의 의도를 끊임없이 물었지만, 그는 “소담한 걸 좋아하고 떠벌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 성격처럼 하얀 종이를 좋아하는 것도 자연 발생적인 발견 같은 것”이라는 식으로 초지일관했다.
당시의 많은 미술 관계자가 기억하고 기록한 대로 유난히 겸손하고 과묵했다는 권영우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후대의 찬사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상상해 본다. 여든한 살에 서울시립미술관에 대작 70여 점을 기증하고 회고전을 개최함으로써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리움미술관(前 호암 갤러리), 서울시립미술관이라는 3대 메이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당시로서는) 유일한 작가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야말로 도깨비처럼 살았다”고 삶을 돌아보았다. 쉰두 살의 나이에 화단에서의 위치와 교수직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그림만 그리겠다”며 돌연 파리로 떠난 것도 ‘둑을 지키는 포플러 나무’가 아닌 ‘넓은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이 되기를 열망했고 영원한 이방인 혹은 이단아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권영우는 세상의 규범과 정통성에 얽매이길 거부하고 스스로 만든 규칙을 파괴하며 삶의 안팎 질서를 깨뜨리면서도 작가적 확신을 놓지 않았고, 그렇게 순수하게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한 미술가다. 자기 복제와 요령, 관례적이고 생산적인 미술 작업을 늘 경계한 그는 길을 잃기를 각오하고라도 자기 작업에 끝내 익숙해지지 않음으로써 나날이 새로워지기를 택했다. 이런 성향의 작가가 작품에 거창한 제목을 붙일 리 없고(작품 제목이 거의 모두 <무제>다), 그중 어디에는 낙관이 있고 어디에는 사인이 있으며 그마저 없는 작업도 있다. “내 얼굴에 굳이 내 이름을 써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권영우가 평생을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이 이뤄 낸 업적 안에서 산 게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만들지 못하는 회화를, 작품을, 미술을 몸소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이기에 훗날 “내 본연의 무로 돌아왔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