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대기업 임금, 노사 고통분담 필요하다

임금 오르면 물가 상승 부추겨
인건비 부담, 산업 경쟁력 저하
대·중소기업 양극화 심화시켜

이동근 한국경영자총협회 상근부회장
“한 사람의 임금 인상은 다른 사람이 마주하는 상품가격을 올릴 뿐만 아니라 그 자신과 이웃의 일자리를 희생시킬 수 있습니다.”

1975년 당시 영국 총리였던 해럴드 윌슨이 정부의 인플레이션 대응 정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표한 대국민 메시지다. 물가와 임금이 동시에 20% 넘게 폭등하는 상황에서 노동당 출신 총리가 임금 인상은 인플레이션의 해법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져 경제 전체의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강조한 것이다. 1975년 영국과 현재 우리 경제가 처한 상황은 분명히 다르지만, 윌슨 총리의 메시지에서 고물가 상황에서 고율 임금 인상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볼 수 있다.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6%대를 기록하며 가파른 물가 상승세가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기대심리까지 높아진다면 상품·서비스 등의 가격 인상이 당연시되고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도 거세져 물가는 더욱 빠르게 오를 수밖에 없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 중 하나는 대기업 임금 인플레이션이다. 올해 300인 이상 기업 근로자 임금이 전년 동기 대비 10.4% 인상(4월 누적)되면서 같은 기간 300인 미만 기업(4.6%)에 비해 2배 이상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는 재작년 정보기술(IT)업계에서 시작된 고율 임금 인상 분위기가 산업 전반으로 확산하면서 올해 초부터 일부 대기업이 10%에 달하는 임금 인상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고물가라는 명분까지 쥔 대기업 노조들이 임금 인상 투쟁 강도를 높이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대·중소기업, 경영 상황이 좋은 기업과 좋지 않은 기업을 가리지 않고 올해 임금은 당연히 예년보다 많이 인상될 것이라는 근로자의 기대가 커지기에 충분하다.

지난 4월 한국은행은 “올해 하반기 이후 임금 상승률이 높아질 가능성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물가 상승→임금 상승→물가 추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도 배제할 수 없다”고 예상했다. 대기업 임금 인플레이션 확산세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한국은행의 우려가 현실화한다면 고물가 상황이 굳어지면서 경제 불안은 더욱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

생산성을 넘어선 고율의 임금 상승은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가중시키고 산업 경쟁력을 떨어뜨린다. 추후 경기 침체로 기업이 어려워지더라도 임금의 하방경직성으로 인해 이미 한 번 올라간 임금 수준을 조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더욱이 고물가·고금리·고환율 등 3고(高) 현상으로 지급 여력이 현저히 낮아져 고율 임금 인상을 감당할 수 없는 기업, 특히 중소·영세기업은 상품가격 인상과 인력 감축 사이의 선택 기로에 설 수도 있다.대기업 중심의 고율 임금 인상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올해 10인 미만 사업체 근로자 임금은 300인 이상 사업체의 51.9%(4월 누적)에 불과했다. 코로나19를 힘겹게 버텨온 중소 영세기업 대부분은 기존 직원의 고용조차 유지하는 게 버겁다. 대기업 임금 인상을 쫓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게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율 임금 인상 분위기가 확산한다면 중소기업과 저임금 근로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근로 의욕 저하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이를 고려해 6월 말 경제부총리는 일부 IT 기업과 대기업의 임금 상승세에 우려를 밝힌 바 있다. 올해 4월 경총이 고임금 대기업의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그 재원으로 중소 협력사와 취약계층을 지원하고 청년 고용을 확대해달라고 회원사에 권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특효약 같은 해결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가 안정을 위해 급격한 금리 인상이 계속되면 경기 침체와 투자, 고용 감소를 감내해야 한다. 인플레이션을 비롯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든 경제주체의 양보와 고통 분담이 필요하다. 특히 대기업 노사 양측의 결단력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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