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쿠르상 수상작가 "자신의 분신과 마주할 때 반응이 궁금했다"

에르베 르 텔리에, 수상작 '아노말리' 국내 출간 간담회
어느 날, 생김새와 DNA·신분까지 동일한 나의 분신을 만나게 된다면. 나 자신과의 대면에 우린 어떻게 반응할까. 지난 2020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는 이런 궁금증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이 작품을 쓴 프랑스 소설가 에르베 르 텔리에가 '아노말리'의 국내 출간과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차 내한했다.

에르베 르 텔리에는 2일 서울 중구 한 음식점에서 간담회를 열고 "나 자신과 대면한다면 어떨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했다"고 이야기의 출발점을 소개했다. 국내에 처음 출간되는 그의 작품인 이 소설에는 접점이 없는 듯한 8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중생활을 하는 청부 살인 업자, 자살 후 명성을 얻은 소설가, 동성애자인 나이지리아 뮤지션, 아버지로 인해 말 못 할 비밀을 품은 어린 미국인 소녀, 나이 차가 나는 연인인 건축 설계사와 여성 영화 편집인 등이다.

이들 인물은 미스터리한 사건을 겪으며 분기점을 맞는다. 이들이 탑승한 파리-뉴욕 노선 여객기는 2021년 3월 공포스러운 난기류(적란운)를 통과한다.

석 달 뒤인 6월에도 똑같은 비행기가 동일한 승객을 싣고 동일 지점에서 난기류를 만나고, 3월의 승객과 6월의 승객은 도플갱어처럼 둘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작가는 "보통 한 명의 주인공을 두고 여러 상황을 겪어나가며 이면을 탐색하는 데 저는 반대로 시작했다"며 "한 가지 상황을 가정한 뒤 개별 인물이 동일한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소설 속에서 3월의 승객은 미국 뉴저지의 공군기지 격납고에 억류된 6월의 승객, 즉 자신의 분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분신을 바라보는 태도는 각기 다르다.

한쪽을 잔혹하게 죽이기도 하고, 자녀를 두고 갈등을 벌이기도 한다.

반면 자기를 희생하거나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는 "인생에는 급류를 타는 순간이 있고 두 번 기회를 갖는 순간이 있다"며 "그렇다면 우린 인생에서 뭘 바꿀 수 있을까.

상대방이 같은 나임에도 본질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은 뭘까.

소설을 쓰며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데 필수적인 사랑하는 존재들은 나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아노말리' 속 큰 얼개인 미스터리한 사고, 도플갱어 모티프는 사실 그리 새롭지 않다.

그는 "제가 쓴 작품 중 완전히 새로운 건 없다"며 "문학, 영화, 등 예술에선 어떤 것도 완전히 새로운 걸 만들어내기란, 창조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대중성과 문학성을 충족하고자 인물에 걸맞게 다양한 장르로 변주하며 마치 미드를 보는 듯한 서사를 펼쳐나갔다.

대중적인 소설을 쓰길 원한다는 작가는 "인물의 특성에 맞는 문학 장르, 문체로 텍스트를 구현했다"며 "살인청부업자 블레이크의 스토리는 스릴러의 법칙을 지켜나갔고, 소설가 빅토르 미젤의 이야기는 문학분석적인 장르로 각각의 스타일을 부여했다"고 말했다.
에르베 르 텔리에 작가는 1991년부터 단편, 장편, 희곡, 시 등의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을 썼다.

수학자, 언어학자, 과학기자, 라디오 프로그램 출연자 등 여러 활동을 해왔다.

레몽 크노, 이탈로 칼비노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참여했던 실험적인 문학 창작 집단 '울리포'(잠재 문학 작업실)의 회원이자 2019년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울리포에 대해 "이탈리아, 미국, 스페인 등 다양한 국적의 멤버들로 구성돼 있다"며 "한국 작가도 언젠가는 참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여덟 번째 장편인 '아노말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불어닥친 시기에 출간돼 평균 30만~40만 부가 팔리던 여느 공쿠르 수상작들과 달리 판매량 110만 부 이상을 기록했다.

세계 45개 국가에도 판권이 팔렸다.

그는 "공쿠르상 수상작을 발표한 날이 프랑스 봉쇄령이 해제돼 서점이 문을 연 날이었다"며 "기대감이 커져 사람들이 서점으로 돌진한 덕을 봤다.

내가 고집한 '아노말리'란 제목도 한몫했다.

(팬데믹으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과 맞닿은 무미건조한 제목도 재해석됐다"고 웃음 지었다.

이어 "2019년에 탈고했는데, 소설 속 이야기가 코로나19 때 못하던 여행이 등장하고 배경도 국제적이다 보니 세계를 만나고 싶은 독자들의 열망을 만족시킨 것 같다"며 "여느 공쿠르상 수상작보다 3배가 더 팔린 건 특이한 현상이라고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 작가 책도 프랑스어로 번역됐을 때 공쿠르상을 받을 여지가 있는지 묻자 "아직 해외 번역 작품이 수상한 적은 없다"며 "세계 문학 작품 중 프랑스어로 쓰인 작품은 약 10%밖에 안 되니 다양성을 추구하는 측면에서는 좋은 생각이다.

내가 심사위원은 아니지만, 번역본에도 수여한다면 번역가가 같이 상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봉쇄령으로 여러 한국 작품을 봤다"며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기생충'을 비롯해 '오징어게임', '부산행'을 재미있게 봤다"고 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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