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하이에크가 보는 기본소득

하이에크에 있어 평등은
분배의 평등 아닌 '법 앞의 평등'
소득은 정의·불의로 나눌 수 없어

질병·실업·불황 등
불가피한 역경에 처한 이에게
국가의 최저소득 보장은 적절

민경국 < 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
기본소득이란 소득수준과 관련 없이 모든 사람에게(보편성) 반대급부로서 노동할 의지와 상관없이(무조건)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현금이다. 주류경제학에서 기본소득을 주장한 사람은 자유시장을 옹호했던 밀턴 프리드먼이 아니던가! 그는 자신이 제안한 음의 소득세는 기본소득제와 동일하다고 인정하고 기본소득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 제도가 본래 자유시장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연 프리드먼이 자유시장 주창자였는지 의심스럽다.

일자리 상실, 질병, 사고, 불황 등 경제적 생존에 대한 불안으로 인간다운 삶이 불가능하다고 기본소득 옹호자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시장의 ‘생존 위협’ 때문에 하기 싫은 일도 억지로 해야 하는 노동은 강제노동이라고, 그런 강제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기본소득이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이 없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고, 그래서 시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런 자유 개념은 조세의 형태로 타인의 재산을 빼앗을 자유다. 그런 자유야말로 시장을 파괴하고 인간을 빈곤과 노예의 길로 이끈다고 경고한 인물이 오스트리안 학파 경제학을 선도했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아니던가!기본소득론은 노동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들어 모순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보장하기만 하면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미있는 일을 추구한다는 이유에서 인간은 여가보다 노동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은 물질적 향유를 위해 참아야 할 고통이다. 인간이 여가를 포기하고 노동을 선택하는 이유다. 노동의 내재적 동기를 인정한다고 해도 의미있는 노동도 고통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기본소득의 세계는 생산과 소득이 분리돼 있다.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소비자에게 가치있는 생산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세계에서 소득은 타인에게 가치있는 생산을 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각 개인은 타인이 추구하는 선호·목적·가치 등을 고려해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런 고려를 가능하게 하는 게 가격의 지식전달 기능과 경쟁의 신지식 발굴 기능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의 세계에는 하이에크가 인식했던 두 가지 기능을 통해 지식 사용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장이 없다는 걸 주류경제학의 틀 안에서 사유했던 프리드먼이 어떻게 알겠는가!

개인의 선택과 관련 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사회가 공정사회라고, 시장은 모든 개인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불공정하다고 기본소득론자들은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주장의 배후에는 분배의 평등이 자리잡고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을 똑같게 만드는 평등은 하이에크에게 있어선 안 된다. 그에게 평등은 자유주의의 유서 깊은 법 앞의 평등이다.시장 소득의 분배 결과를 두고 공정 또는 불공정하다는 기본소득론의 도덕적 평가도 문제다. 그런 평가엔 시장은 분배하는 인격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시장은 수많은 사람이 상호작용하는 복잡한 현상일 뿐이다. 그런 현상 속에서 개인들이 벌어들인 소득을 두고 정의 또는 불의를 따지는 건 환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인물이 하이에크가 아니던가!

시장사회에서 질병·실업·불황 등, 누구라도 피하기 어려운 역경이 있게 마련인데 대부분의 개인은 혼자서 이겨내기 힘들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외면할 하이에크가 아니었다. 시장이 그들에게 마련할 수 없는 최저소득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적절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최저소득 개념을 제도화한 게 하이에크가 제안했던 국가의 사회보험제다. 보험 제도에서 소득은 언제 어느 때나 모든 사람이 받는 게 아니라 예상하지 못한 재정적 손실을 당한 사람만 받을 수 있다.

시민이라는 이유로 부여받는 권리로서 제도화된 게 기본소득인 데 비해 하이에크의 콘셉트는 시장이 부양할 수 없는 사람이 정부로부터 일시적으로 지원받을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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