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소재·부품, 정부 눈엔 쉬워 보이나

"과거 정권 비판하며 정책 답습
1등 大·中企는 시장이 만들어
일본이 겁내는 건 기업가정신"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정부 자금 의존 때문에 실패했다.” 김진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진단이다. 여당의 경제통으로 불리는 김 의원은 민간 자금에 의한 기술벤처가 경제 위기 돌파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 정부의 혁신성장은 다른가?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벤처 투자 증가를 정부 성과로 내세웠다. 대통령은 추가경정예산을 통해 정부가 출자하는 모태펀드 재원 투입을 8000억원으로 확대한 덕분이라고 했다. 대통령은 또 모태펀드가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을 탄생시키고 있다고 믿는 듯했다.일본의 수출 규제 대응 추경 얘기가 나오자마자 각 부처는 예산안을 제출했다. 여당은 8000억원 증액을 요구했다. 정부가 매년 소재·부품 국산화에 조(兆) 단위 예산을 퍼부을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돈으로 다 되면 어느 나라라도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 전에 시도했다 실패한 정책을 다시 끄집어내고 있다.

정부 지원으로 치면 일본은 우리의 선배다. 관료들이 돈 나눠주는 방식으로 소재·부품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일본은 잘 안다. 일본 기업들이 두려워할 게 있다면 한국에서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해 그들이 독점 공급하고 있는 소재·부품에 도전하는 겁 없는 경쟁자들일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런 기회가 있었다. 2000년 전후 벤처붐 때다. 당시 벤처투자의 70~80%를 차지한 정보통신기술(ICT) 쪽에서는 주목할 투자 패턴이 있었다. 삼성전자 등 대기업이 세트를 개발해 세계 시장에 공급하면서 벤처는 소재·부품 등을 담당하는 구도가 펼쳐졌다. 여기에 벤처캐피털 투자가 몰려들었다.정성인 한국벤처캐피탈협회 회장은 그 이유에 대해 “투자 판단이 어렵지 않았고, 대기업을 통해 세계 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시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 불행히도 지금은 제조 기반의 이런 벤처 투자 비중이 10% 안팎에 불과하다. 지난 20년간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정부는 대기업의 벤처 투자를 제한했다. 인수합병(M&A)도 어렵게 했다. 말이 중소기업과의 상생·동반이지 대기업의 팔을 인위적으로 비트는 방식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정부는 기술 탈취 사례를 일반화시켜 대기업이 중소기업과의 기술 협력을 더 꺼리게 만들기도 했다. 이런 정책은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여기에 대기업 연구개발(R&D) 투자 세제 혜택은 깎고, 법인세율은 다시 올려놓은 마당이다. 대기업 적대 정책은 투자까지 밖으로 내모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벤처는 벤처대로 ‘잃어버린 20년’을 보내야 했다. 벤처 거품 붕괴의 책임을 묻는 ‘벤처 건전화 방안’은 긴 시련의 예고탄이 됐다. 벤처 투자는 식어 갔고 일본 기업을 이겨보겠다는 소재·부품 벤처의 열정도 사그라지고 말았다.문 대통령은 일본의 경제 보복과 관련해 “국내에서 제품을 생산할 능력이 있음에도 일본과의 협력에 안주하고 변화를 적극 추구하지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20년 전부터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서로 밀어주고 끌어줬으면 어떠했을까요?”라는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말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면 정부가 그 책임을 기업에 돌릴 수 없다. 대통령은 “정부야말로 변화를 추구하지 않은 것 같다”고 반성해야 하고, 박 장관은 “20년 전부터 대기업과 벤처,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적대 관계로 몰아넣은 게 후회스럽다”고 고백해야 책임 있는 정부일 것이다.

일본이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밝힌 3개 품목 중 하나인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중견기업 동진쎄미켐의 이부섭 회장은 남을 탓하지 않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협력도 주고받을 게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결국 기업이 투자로 헤쳐 나아가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이런 기업이 어떻게 하면 100개, 1000개 더 나올지 고민해야 소재·부품 문제가 풀린다.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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