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공동체의 회복과 육아 나눔] 아이가 존중받는 돌봄 여건을 만들자 #1

프랑크 쉬르마허는 우리의 운명이 부모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형제자매 없이 홀로 외롭게 자란 아이들에게 전적으로 달려있는 형국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부모가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적은 수에 아이를 낳았으며, 우리의 아이들도 이러한 관행을 반복한다면 틀림없이 40년 이상을 가족을 부양하는데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며 개인주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며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강한 충성심 등은 아마도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프랑크 쉬르마허가 예측한 미래가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부모세대의 대부분은 아이 낳을 수 없는 이유를 수 백 가지도 넘게 제시하며 늦은 나이에 매우 적은 수의 아이를 낳았다. 그 결과 초저출산 국가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주고 있다. 예컨대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올해는 고등학교 졸업생 수보다 대학 입학정원이 많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교육부에서 발표한 ‘2주기 대학 구조개혁 기본계획’을 살펴보면 2019년부터 2021년 사이에 급격한 학생 수 감소가 예상되고 있으며 2023년까지 대학입학정원 10만 5천명을 추가로 감축해야 하는 상황이다. 국회예산정책처에서 발표한 ‘2012~2060년 장기 재정전망 분석’자료에서는 국민연금이 2053년에 고갈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국민연금 고갈을 막기 위해 연금 보험료를 올리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며, 연금이 고갈되면 세금을 걷어서 연금을 지급하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크 쉬르마허의 예측을 뒷받침해 주는 상황이다.그렇다면 우리 세대는 아이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해 주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동안 저출산 문제를 사회문제로 치부하며 정부의 강력한 정책을 요구해 왔다. 가족관계의 회복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정부정책도 가족관계 회복 보다는 가시적인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정책들을 선호했다. 예컨대 양육자의 부담을 완화시킬 수 있도록 돌봄 시설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시키고 돌봄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시설에 아이들을 맡기는 상황으로 왜곡된 것이다. 그 결과 아이들은 이른 아침 시간에 등교해서 학교 공부를 하고, 하교 후에는 돌봄 교실이나 학원을 가야만 했다. 마음껏 놀고 싶지만 안전 관리라는 미명 속에 마음껏 뛰 놀 수 없었고 놀이 활동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공부에 취미가 없는 아이들은 세상에서 기댈 언덕이 좁아졌다. 가족과 함께 놀고 싶지만 엄마 아빠는 바쁘고 형제와 자매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과연 행복했을까? 불편한 진실이지만 OECD자료에 의하면 우리 아이들의 삶의 만족도는 꼴찌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해 부터는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정책적 변화도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마을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을 돌보자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으며, 출산장려금을 250만원씩 지급하면서 가족의 책임을 높이자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양육자의 부담을 감소시키는 정책이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정책은 아니다. 더욱 슬픈 현실은 그동안 정부에서 추진된 많은 정책들이 양육자의 양육부담을 낮추어주는데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양육부담 완화가 출산율 증가로 이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생각해 볼 부분은 ‘양육부담 완화’와 ‘출산율’의 관계이다. 출산은 가족의 핵심적인 기능이다. 가족 기능이 회복되지 않으면 출산율은 본질적으로 높아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가족 기능은 매우 복합적이다. ‘양육자의 양육부담’은 가족 기능 가운데 하나가 과부화가 걸리면서 나타나는 일부 현상인 것이다. ‘출산 기능’은 가족 간의 ‘사랑’, ‘믿음’, ‘희생’, ‘헌신’, ‘봉사’, ‘존중’ 등의 가치를 통해 기능하게 된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 아이는 귀찮아지고 힘들어진다. 남편이나 아내의 소득이 앞으로 불안정해질 것이고 우리 가정은 파탄으로 갈 것이라는 불신이 생겨날 때 양육은 힘들어진다. 하지만 반대로 지금은 조금 힘들고 불편하지만 우리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때 출산에 대한 가치를 느낀다. 내가 지금은 힘들지만 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아내를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서 생활비를 만들더라도 그게 사랑이면 행복감을 느끼고 살아간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우리의 아이를 부담스러워하고 귀찮아하고 심지어는 손해 보는 ‘결혼을 왜 하는가?’ 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노년이 되었을 때 누군가 우리를 부양하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노년이 되어 받게 되는 국가의 복지 혜택은 지금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경제 활동을 하면서 부담하는 세금으로 운영될 것이다. 이미 많은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실이지만 우리가 납부했던 국민연금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의료보험 재정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의 사랑을 충분하게 주지 못하고, 치열한 경쟁 속에 정서적으로 메마른 아이들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며, 공동체 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나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서는 본인의 가족을 부양하거나 가족 이외의 노인들을 부양하라고 하면 과연 그게 합리적으로 가능한 것일까?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정부에서 추진되고 있는 정책 가운데 ‘공동육아나눔터사업’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들이 함께 모여’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양육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위로하고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여느 돌봄 시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부모의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점과 부모들끼리의 소통을 통해 공동체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함께 돌보는 공간 속에서 부모의 참여정도는 2주에 한번 또는 1주에 한번, 매일 등 매우 다양했지만 부모의 참여는 반드시 이루어졌고,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하고 다른 친구들과 함께 놀이하는 가족 공동체 안에서 ‘믿음’, ‘애착’, ‘신뢰’, ‘나눔’ 등의 가치들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업 방식은 그동안 추진해 온 기존의 정부 정책 사업과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비록 이러한 사업방식이 참여 인원 등 계량화된 수치로 성과를 보여주기 어려워 현재 정부 정책 사업 가운데 소외되고 있는 사업이지만 향후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사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글= 정영모 한양대학교 교육복지정책중점연구소 연구교수

정리= 경규민 한경닷컴 기자 gyu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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