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난쟁이 던지기 놀이'…모두가 즐겁다면 문제 없다고?

삶의 격

페터 비에리 지음 /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468쪽 / 1만6000원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 나오는 ‘난쟁이 던지기 놀이’ 장면. 저자는 “존엄성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존엄을 마음대로 던져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한경 DB
안정된 삶을 버리고 리스본으로 가는 열차를 탄 라틴어 교사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작품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원작자인 파르칼 메르시에의 본명은 페터 비에리로 스위스 출신 독일 철학자다. 독일 최고의 철학 석학으로 불리는 그가 최근 출간한 철학 에세이《삶의 격》은 인간의 존엄성을 다룬다.

저자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 ‘내가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라는 세 가지 틀로 인간의 존엄성 문제를 바라본다. 개인 간의 존엄성이 부딪히거나 개인과 집단의 존엄성이 충돌하면 무엇을 먼저 고려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해 탐구한다.

저자는 먼저 ‘독립성으로서의 존엄성’을 얘기한다. 인간은 누구의 부속품이 아니라 모든 경험을 스스로 하기 때문에 존재 가치를 얻는다. 저자는 ‘난쟁이 던지기’ 놀이를 사례로 든다. 말 그대로 누가 키 작은 남자를 더 멀리 집어 던지는지를 겨루는 놀이다. 비에리는 이 놀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는 사람과 짧은 언쟁을 벌이고, 급기야 그날 대회에서 던져진 ‘난쟁이 남자’를 찾아가 따진다. “타인의 재미를 위해 구경거리가 된 것을 어떻게 참을 수 있느냐”는 그의 질문에 남자는 반박한다. “나는 자발적으로 나선 겁니다. 던져지겠다고 결정한 사람이 바로 나란 말입니다.”

누가 봐도 존엄성을 해치는 순간이지만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할 때 우리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는 “존엄성은 법적 장치를 통해 보호되며 이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보다 상위에 있는 가치이기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존엄을 마음대로 던져선 안 된다”고 정리한다.저자는 이어 다양한 차원에서의 존엄성을 이야기한다. ‘만남으로서의 존엄성’에선 인간 사이의 만남에서 생길 수 있는 존엄성 훼손을 조명한다. 그는 상대방을 깔보는 것뿐만 아니라 인정해야 할 때 인정하지 않는 것도 존엄의 훼손이라 말한다. 사적인 은밀함도 존엄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이 은밀함이 깨져 밖으로 흘러나갔을 때 어떻게 존엄이 무너지는지도 짚어낸다. 존엄이란 말에서 쉽게 떠오르는 ‘존엄사(안락사)’ 문제를 비에리는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개념으로 설명한다.

옮긴이는 “존엄성은 생산적으로 어울려 사는 삶의 한 방식이고, 각 개인이 서로를 이끌어주고 서로에게 길을 터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굴욕감이나 모욕을 주지 않고서도 잘못된 점을 고쳐주고 때로는 상대방을 거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정의했다. 개인이 소외되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존엄이란 단어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화두로 다가온다.

저자는 독자를 가르치려 하기보다 자신의 생각을 담담히 얘기하고, 흥미롭고 다양한 사례를 통해 독자들을 ‘존엄의 세계’로 이끈다. 차분히 앉아 한 장씩 읽어나가면 지적 즐거움의 바다를 항해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소설가로도 유명한 저자의 필력과 사유의 폭에 감탄이 나온다.

박상익 기자 dir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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