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과 날줄] 여름의 찬란한 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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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A27
한여름 절정의 불볕더위에도 노동의 땀 없는 휴식은 염치 없어긴 장마 끝나니 연일 불볕더위가 이어진다. 몇 십 년 만의 폭염, 열대야, 최대치에 이른 전기사용량과 블랙아웃(대정전) 위기, 피서 인파, 무더위에 쓰러지는 노인들. 날마다 쏟아지는 이 여름 뉴스들이 즐겁지가 않다. 말복이 지났어도 이 한낮 땡볕의 기세는 누그러들지 않는다. 목덜미에 닿는 햇볕은 마치 촛농이 떨어진 듯 따갑다. 햇볕이 정수리에 닿을 때, 정수리를 뚫는 열과 빛 때문에 뇌수는 흐물흐물 녹는 듯하다. 이 직사광선 아래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찜통더위에 지쳐 목마름을 풀어줄 찬물을 찾고, 더위를 피할 그늘만을 찾는다. 더위에 널브러진 육체의 사고와 판단 정지, 무기력, 헐떡거림 말고 더 생생한 것은 없다. 더위로 한껏 달궈진 도심을 등지고 표표히 떠나 숲과 바다를 찾은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영혼을 분출해 삶의 열매 거두길
장석주 시인
사람들이 폭염과 싸우는 동안, 한여름의 대지에 축복처럼 쏟아지는 풍부한 일조량, 그 열기와 빛을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만물의 알맹이들은 살찌고 있다. 과일들은 이 땡볕을 자양분처럼 받아들이며 과육을 더하고 단맛을 품으며 무르익는다. 땡볕 속에서 익어가는 과일들은 온갖 고난을 견디며 성숙하는 자연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이 혹서(酷暑)에 우리가 한 일이란 무엇인가? 서늘하고 쾌적한 그늘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백색의 빛들이 넘실대는 바깥으로 감히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어둑한 실내에서 인터넷 뉴스나 검색했다. 저녁에는 슈퍼마켓에서 사온 수박 몇 통을 식구들과 함께 깨먹고, 에어컨으로 식힌 실내에서 책 두어 권을 읽었을 뿐이다. 오, 여름 내내 땀방울을 뚝뚝 흘리는 보람찬 노동은 꿈조차 꾸지 못한 사람에게는 여름이 주는 한 줌의 감미로운 행복조차 누릴 염치가 없다. 여름의 절정에서 읽은 한 시인의 시구가 천둥 번개처럼 내 몸에 꽂히듯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자, 가자꾸나! 그 어두운 곳에 틀어박혀 있지 마라!”라는 시구는 마치 나를 겨냥한 듯하다. 나는 화들짝 놀라고, 감탄하며, 정신을 차린다. 덥다고 일손을 아예 놓아버린 채 마냥 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켜야 할 약속들이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금세 닥칠 연말에 나와야 할 책들, 혹은 내년까지 끝내야 될 책들! 어쩌면 산다는 것은 뭔가를 끊임없이 도모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시인 휘트먼은 삶에의 초대에 응하려는 자는 먼저 “강한 피와 근육과 인내력”이 필요하다고 쓴다. 그랬으니 “용기와 강건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 고난의 길로 들어설 수 없으리./이미 자신의 최선의 것을 다 탕진한 자는 이곳에 올 수 없으리./오직 아름답고 강인한 몸뚱어리를 지닌 자만이 올 수 있으니”(휘트먼, ‘노래하라, 더 드넓은 길을’)라고 단호하게 썼겠지. 제 체온보다 낮은 기온에도 죽을 듯이 허덕이는 자들은 이 축제에 참여할 자리가 없다. 영혼을 분출하는 자만이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이 거친 삶의 길을 갈 수 있으리. 이 삶의 길에서 기쁨으로 충만하고, 보람과 열매들을 거머쥐는 자들만이 행복할 수 있으리!
한낮의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가고, 가로수에 달라붙은 매미들은 한가롭게 울어댄다. 곧 다가올 처서(處暑)가 지나면 매미 울음소리도 잦아들겠지. 넘치는 이 여름의 찬란한 빛줄기, 열기를 내뿜던 보도(步道)들, 도서관의 열람실을 꽉 채운 사람들, 밤하늘의 별무리, 쩍쩍 갈라지던 붉은 수박들, 어두운 수풀 위에서 반짝이던 반딧불이들도 여름과 함께 다 지나가겠지. 포도나무의 열매들은 무르익고, 젊은 연인들은 부부가 되고, 요람에 잠든 아기들은 자라나 청년이 되겠지. 모든 것들은 빠르게 지나간다. 지나간 것들은 그리워지는 법. 시간은 되풀이하지 않고 단 한 번으로 끝날 것이기에. 지나간 것들은 우리 기억의 깊은 곳에서 아득한 추억으로 새겨진다. 이 여름을 보람되게 보낸 사람은 먼 뒷날 한 시인과 같이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의 싱싱한 빛이여!”(보들레르)라고 아득함에 젖어 추억하리라.
곡식과 열매들이 익어가는 여름은 찬란하고 위대하다. 여름 과일들이 제 속을 채우며 익어가듯 우리의 미래, 자유, 사랑, 위엄도 이 여름 속에서 무르익고 있으니!
장석주 시인